"살려 달라"는 한 여인의 절규도, 차에 치어 신음하는 두살 배기 아이도 모두 외면 당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타인의 울부짖음을 외면한 채 자신의 안위만을 돌보는 현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지난 4월1일 귀가하는 20대 여성을 납치해 성폭행하고 토막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됐고 살인범 오원춘(42)은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진술했다.

일명 '수원 토막살인'이라고 불리는 이번 사건은 외국인 범죄에 대한 조명과 경찰의 대응체계 부실 등에 대한 지적을 불러왔다. 사건 발생 당시 피해여성이 내질렀던 외마디 비명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 여성은 감금된 상태에서도 오원춘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 여러 차례 도움을 요청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경찰의 부실 대응에 대한 징계 조치는 내려졌다. 하지만 피해여성의 살려달라는 외마디 절규를 방관한 우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서울 동작구 한 원룸촌에 거주하는 김가람(25·여)씨도 대학 시절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사건 당일 오후 11시쯤 되었을까. 가게가 즐비한 집 앞 도로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던 김씨에게 모자를 푹 눌러쓴 한 남성이 다가와 "10분만 시간을 내 달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영문도 모른채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그 남성은 계속 "10분만"을 반복했다. 김씨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던 차, 이 남성은 "한 번만 (성관계를) 해주면 사례를 해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씨는 겁이 난 나머지 길 건너편 비디오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가게 구석으로 가서 쭈그린 채 "변태가 쫓아온다"며 엉엉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에게 돌아온 건 이상한 눈초리 뿐이었다. 결국 그는 남동생이 자신을 데리러 올 때까지 가게 안에서 꼼짝 않고 기다렸다고 했다. 김씨는 "'만약 내가 도망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에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고 전했다.

이처럼 자신의 안위만을 돌보는 사회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선진국 국가에서 나타나는 방관자적 개인주의 확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심리학계 관계자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범죄에 대응하는 개인의 행동은 달라질 수 있다"며 "실제로 방관자적 태도는 과거보다는 현재, 개발도상국보다는 선진국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선진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개인주의가 확대됐다는 것.

경기대 이수정(범죄심리학) 교수는 "사람들은 누군가 곤경에 처했을 경우 굳이 도와줘서 남의 일에 끼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라고도 설명했다.

'살인 사건을 목격했지만 그 속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다'는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심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안전과 시간, 당초 계획 등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 예상치 못한 일에 선뜻 나섰다가 기존에 약속했던 것들을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일각에서는 방관자에 대한 처벌 규정 마련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크다. 살인사건 등 중범죄를 방조한 경우 봉사활동이나 재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재범을 방지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는 '착한 사마리아인법'과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착한 사마리아인법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조 불이행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다.

일부 해외 국가에서는 이같은 구조거부행위에 대해 처벌이 가능토록 법으로 정해 놓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자기 또는 제3자의 위험을 초래하지 않고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을 구조할 수 있음에도 고의로 구조하지 않은 자에 대해 5년 이하의 구금 등에 처하고 있다.

폴란드는 개인적인 위험으로 부터 본인 또는 본인과 가까운 사람들을 노출시키지 않고 구조할 수 있음에도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지 않은 자에 대해 3년 이하의 금고나 징역에 처한다.

이 밖에 독일과 포르투갈, 스위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도 구조거부행위에 대한 처벌을 시행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이같은 법안이 마련돼 있지 않다. 다만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에서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에게 응급의료 또는 응급처치 등을 제공해 발생한 재산상 손해와 사상(死傷)에 대하여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해당 행위자는 민사책임과 상해에 대한 형사책임을 지지 아니하고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은 감면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우리는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더라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는 타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개인의 도덕적 판단에 따라 피해 당사자의 생사가 갈림길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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