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박길홍의 마스터피스

‘문명을 삼킨 자본’ ‘이성을 삼킨 폭력’ ‘정신을 삼킨 육체’

지난해 칸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Cosmopolis)>는 “자본으로 인해 도리어 문명이 지배당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을 던지는 영화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육체와 현상, 문명과 변이에 대한 충돌을 곧잘 다뤄왔고 이를 통해 인간을 해부하고 짓이기는데 능통한 감독이다. 그리고 이번엔 ‘자본주의의 모순’이라는 메스를 꺼내 관객에게 들이 댄다. 이 메스는 꾀나 날카롭고 예리해 잘못 다루면 쉽게 베일 수 있어 보인다. 크로넨버그는 이 메스를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자.

<코스모폴리스>의 시작은 이렇다. 주인공 에릭 패커(로버트 패틴슨)는 화폐의 흐름을 분석해 막대한 부를 얻게 된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경호원으로부터 호위를 받고 있는 리무진에 기거하고 있으며 맨해튼을 횡단 중이다. 맨해튼은 미 대통령의 방문, 유명 뮤지션의 장례행렬, 자본주의의 항거하는 격렬한 시위자들과 맞물려 극심한 정체를 빚고 있다. 포화직전의 도심 한편에 이내 슬로건 하나가 시야에 들어오고 슬로건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자본주의라는 망령이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

 

 

   
 

 

#문명을 삼킨 자본에 대한 은유
주인공 에릭 패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쉽게 동화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표정의 변화도 거의 없을뿐더러 극중 인물들과 무수히 많은 대화를 주고받지만 정작 그들과 내적으로 교류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도무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가 아닌 그가 머물고 있는 공간으로 향한다.

그가 극중에서 대부분 할애하고 있는 공간은 뉴욕 맨해튼을 횡단 중인 리무진이다. 리무진이라는 공간은 에릭에게 고용된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대면하는 공간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금융전문가를 비롯해 인문학자, 큐레이터 등이 그의 리무진을 찾아 환율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얼핏 리무진이란 공간(피상적인 의미에서)은 자본의 경계를 구분 짓는 다시 말해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계를 구분 짓는 공간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리무진 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은 적막한 리무진 내부와는 달리 시위자들로 인해 요동치고 있다. 이들은 금방이라도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것처럼 광분해 있고 공분의 제공자이자 근원은 리무진 안의 인물 ‘에릭 패커’에게로 향해 있는 듯 보인다.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항거하는 이유는 화폐를 거부하기 때문인데 정확히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난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자본의 메커니즘을 주무르는 자(에릭 패커도 이에 속함)들로 인해 빈부의 극심한 양극화가 발생했기 때문인데 여기까지만 보면 <코스모폴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계급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로 치부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주제로 한 영화들은 으레 계급적 투쟁을 다루기 마련이며 근래 개봉한 <설국열차>와 <엘리시움> 역시 지배자(자본가)와 피지배자(노동자)를 충돌시킴으로써 야기되는 폭력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코스모폴리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주제를 교묘히 비틀고 변주한다. 이는 문명을 집어삼킨 자본에 대한 은유이며 이 은유는 특정 이미지를 통해 더욱 뚜렷하게 전시된다.

#재앙의 징후로 빗댄 ‘쥐’의 이미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꾸준히 관람했던 이들이라면 <코스모폴리스>를 통해 전시된 이미지들은 결코 생경하지 않다. 그의 초기작 <비디어드롬>과 <네이키드 런치>에서 구현된 이미지들과 비교하면 <코스모폴리스>는 얌전한 편에 속한다. 더구나 <코스모폴리스>에는 미디어와 육체가 결합되는 장면도 없으며, 타자기가 곤충으로 변이되는 장면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무의식에서 파생된 관념의 이미지들을 걷어내고 그곳에 현실적인 이미지들을 보여주는데 가령 <코스모폴리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이미지는 바로 ‘쥐’.

<코스모폴리스>에서는 쥐를 들고 다니는 거리의 여인을 비롯해 레스토랑에 쥐를 투척하고 가는 사내들, 쥐 커스튬을 하고 차 위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자, 거대한 쥐 모형 등 쥐와 관련한 다채로운 이미지들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미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처음엔 그 의미를 역병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것은 역병이나 전염의 의미가 아닌 일종의 ‘징후’로 보인다. 그 이유는 이렇다. 화폐의 실체가 사라진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쥐‘로 묘사하고 있다. 쥐를 화폐로써 사용한다? 통용될 수 있을까? 이는 화폐를 대체하는 수단으로써의 의미가 아닌 어떠한 흐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보다 쉽게 이야기해 보겠다. 과거 사람들은 동물들의 이상행동을 통해 자연의 재앙을 예견하곤 했다. 실제로 홍수나 지진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기 직전 쥐들은 이를 예측해 안전한 공간으로 이동했고,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언제나 끔찍한 자연재해가 발생하곤 했다. 바꿔 말하면 쥐는 화폐로써 통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징후의 상징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쥐의 이동은 곧 자본의 흐름 또는 재앙의 징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쥐가 곧 화폐가 될 것이다’라는 오프닝 타이틀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게다가 이러한 징후는 물리적인 폭력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돔과 고모라
영화 말미에 에릭 패커는 환율 예측을 실패한 데에 따른 단죄로 자신의 신체 일부분을 훼손하는 선택을 한다. 자신의 손등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앞서 언급했지만 쥐는 재앙의 징후이며, 신체 훼손은 징후에 따른 전조증상에 해당된다. 그는 자학을 통해 육체를 통제하고 있는 정신에 다가가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언급된 ‘아프락사스’와 묘한 접점을 이룬다. 알을 파괴하지 않으면 ‘아프락사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새가 바로 ‘에릭 패커’ 아닐까?

언뜻 이 영화의 결말은 명확해 보이지만 마지막 에릭 패커의 생존 여부를 생략시킴으로써 감독은 이에 대한 회답을 잠시 거두어들인다. <코스모폴리스>에서 구현된 도시는 유토피아가 아닌 구약성서에 기록된 타락과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더 가깝다. 결국 ‘국제도시‘라는 의미의 타이틀 ‘Cosmopolis’는 반어법인 셈이다.<글쓴이 박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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