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6.25전쟁 발발 만 50년이 되었다.

6.25때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고종사촌 누님이 고향을 찾아 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 80세를 넘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역시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휴전선 너머 북한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서울 근처에 살았으면서도 50년동안 소식을 끊고 살았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50년 전에 남편 되는 사촌 매형이 우리 부모님을 찾아와 “일제시대 중국,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잠시 머물고 살면서 아들까지 낳았는데 고향 제주에는 4.3사건이 격화되어 불바다가 되고 친인척도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포기한 채 서울에서 지냈는데 6.25를 당하여 처자식을 폭격으로 읽고 혼자 고향에 왔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촌 누님의 죽음을 알렸었다. 젊은 나이에 처자식을 잃고 고향에 돌아와 슬픔에 잠겨던 매형은 재혼하여 아들. 딸 낳고 조강지처였던 누님의 제사까지 잘 모시다가 몇 해전에 세상을 떠났고, 후처와 자식들도 큰어머니 제사를 여태까지 잘 모시다가 몇 해전에 세상을 떠났고, 후처와 자식들도 큰어머니 제사를 여태까지 모시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사촌 누님을 만나자 “도대체 후전선이 가로막힌 북한도 아니고 같은 나라 같은 하늘아래 살면서 50년 동안이나 고향에 소식을 전하지 않고 살았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고 항의하며 따져 물었다.

누님은 긴 한숨을 쉬면서 그 동안 살아온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6.25로 인문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어느 날 인문군이 집에 들이닥쳐 남편을 연행해 가 버려 남편의 행방을 찾으려고 뙤약볕아래 아기를 업고 서울 시내를 해매고 다니다 집에 와 보니 미군기의 폭격으로 집은 박살이 난 상태였다.

그 뒤로 폭격당한 집 주위를 배회하며 남편을 기다렸고 인민군들이 철수해 가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아 의용군으로 끌려간 것으로 생각했으며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거지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처지여서 편지를 쓸 수도 없었지만, 고향 친족들이 4.3사건 때 다 죽었다 하니 편지쓸 곳도 없어진 줄로만 알았다.

게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자니 의용군으로 북한에 끌려간 남편의 가족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고, 어찌어찌하다 재혼까지 하게 되어 더더구나 고향에 올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린 아들을 제리고 온갖 잡일을 하면서 고생하는데 어느새 초등학교에 보낼 나이가 되었지만 호적에 올리지 못해 입학시키지 못하고 고민하던 참에, 월남한 홀아비가 같이 살면 가호적을 만들어 애를 입적시키고 학교도 보내주겠다고 하여 재혼하게 된 것이다.

가호적을 만들어 애를 입적시키고 학교도 보내주겠다고 하여 재혼하게 된 것이다. 그 분과의 사이에도 아들을 구어 형제를 키우며 살았는데 그 분도 오래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홀몸으로 형제를 키우느라 키우며 살았는데 그 분도 오래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홀몸으로 형제를 키우느라 먹고 살기 힘들어 제대로 교육도 못 시키고 지금까지 세월이 흘렀는데 어느 새 나이는 팔십이 넘었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큰 아들의 성씨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 두 아들을 불러 실토를 했더니 작은 아들이 적극적으로 형님의 가족을 찾아야 한다며 여비를 마련해 주어 제주에 오개 됐다는 것이었다.

한편 남편 되는 매형은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풀려나 서울 집에 돌아와 보니 살던 셋방집은 폭격으로 박살이 나 버려 처자식의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3개월동안 박살난 집을 뒤져도 찾지 못하여 혼자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두 분이 서로 엇갈려서 만나지 못한 것이다.

누님은 50년 만에 고향에 와 보니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후처와 자식들이 잘 살며 제사까지 모셔 주었다니 자신이 고생하며 살아온 것도 모두 씻겨진다고 한숨을 쉬었다.

큰 아들도 이렇게 자기 형제가 있고 친족이 많은 것에 놀라며 자신의 진짜 성씨를 찾게 된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소설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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