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중소기업은행 지점장 때 제주의 원로 공무원 출신 어른들과 술자리를 같이 한 일이 있다.

술잔이 오가고 인생의 과거사를 회고하는 화제로 옮겨지자 원로 한 분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 아들을 찾아야 하느냐, 그냥 모른 체하고 넘겨야 하느냐, 지금 나는 고민하고 있다네.” 하고 말을 꺼냈다.

아들, 딸 많이 낳아 다복하게 살고 있는 그 분의 똥딴지같은 말에 모두는 놀라움은 느끼면서 “무슨 소리우꽈? 한번 말해 봅서.” 하고 흥미를 집중시켰다.

그분의 말씀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일제시대 전남의 어느 군청 식산계에 근무할 때 농촌으로 출장갔는데 이장댁에서 저녁 대접까지 받았고 여관이 없는 곳이라 이장댁에서 하룻밤에 묵었다는 것이다.

이장은 “우리 아들은 학교 선생인데 연수받으러 광주에 출장갔고 기회에 며느리도 친정에 다녀 오라 보냈으니 아들방이 비었으므로 그 방에서 하룻밤 묵고 가세요.” 해서 묵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녁 먹으면서 주고 받은 술기운도 있고 해서 곤히 잠들었는데 밤중에 어떤 여자가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서슴없이 이불속으로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이장이 배려해서 여자를 들여 보내준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의심없이 남녀관계가 끝났는데 그제서야 여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당신, 누구세요?” 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장 며느리였던 것이다. “친정에 갔다던데 어찌된 일이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친정 어머니와 한 방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용이 내 몸을 휘감고 놓아 주지 않아 놀라 깨었더니, 어머니가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온 모양이니 빨리 시댁으로 가야 겠다. 시집가서 5.6년이 되어도 애가 없더니 이 용꿈은 태몽이로다.」하면서 십여리 밤길을 어머니와 동행하여 왔는데, 아닌게 아니라 방 앞에 구두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보아라. 너의 남편이 돌아왔지 않느냐. 어서 들어 가거라.」하시며 어머니는 되돌아 가셨어요. 어머니 말을 믿고 방에 들어왔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당황하였지만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이제 또 다시 친정으로 데려다 줄 터이니 어머니에게 「시댁에 가 봤더니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출장 온 손님이 방을 쓰고 있어 누워 잘 곳이 없어 다시 왔어요.」하고 말하고 아무 말도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하여 그 여자를 친정까지 데려다 주고 다음 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던 것같이 조반까지 얻어 먹고 그 집으러 떠났다.

2,3년 동안 그 곳으로 출장나갈 일이 없었는데 4년 만에 그 곳을 지나게 되었다.

역시 이장댁에 들렸더니 이장이 반갑게 맞아 주어 마루에 앉아 며느리가 차려주는 주안상을 받았는데 마당에는 고추달린 어린 아이가 장난치며 뛰어 다녀 “손주 되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장은 싱글벙글하면서 “예! 저의 집 대를 이을 손주올시다. 며느리가 시집와서 7년 만에 저 놈 하나 낳고는 그 뒤로 자식이 없으니 유일한 손주지요.” 하더라는 것이다.

손주라는 놈 생김새를 보니 자기 씨가 분명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했고, 며느리도 어두운 곳에서 하룻밤을 같이 한 정도여서 자기를 알아 보지 못하는지라 그냥 돌아왔다.

지금쯤 그 애는 성장해서 무엇을 하고 있느지 궁금하고 찾아야 하느냐, 그냥 모른체하고 넘겨야 하느냐 갈들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일행들은 “아들. 딸 많이 낳고 다복하게 사는 영감이 이제 와서 그 애를 찾으려 한다면 영감댁에서도 불화의 씨앗이 되고 이장댁의 행복마저 파괴하게 되므로 모른 체하고 지내는 것이 좋겠어요.” 하고 이구동성으로 말렸다.

다른 경우와 달리 고의적인 불륜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관계를ㄹㄹ 밝히고 싶은 심정이 있는 것 같았으나 이제 와서 굳이 밝힐 필요가 있는냐는 의견에 “그렇긴 하지요.....” 하고 수긍했다.

이장댁은 대를 이을 수 있어 행복했을 것이나 이런 일이 이장댁뿐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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