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박길홍의 마스터피스

영화는 크게 극영화와 기록영화(다큐멘터리)로 나뉜다. 극영화는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소재나 인물을 다루는 반면 다큐멘터리는 실제사건과 실제인물 등 사실을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극영화는 픽션이고 기록영화는 논픽션에 해당된다. 사실을 다루느냐 허구를 다루느냐의 따라 장르를 구분 지었던 초창기 영화와는 달리 지금은 점차 다양한 형태로 장르가 파생되면서 장르를 구분 짓는 바로미터가 더욱 모호해 졌다. 이처럼 하나의 장르로 규정짓기 어려운 영화가 이따금씩 등장하는데 ‘알폰소 쿠아론’의 신작 <그래비티>가 이에 해당된다.

 

   
 

120년 가까이 된 영화역사는 그 동안 수많은 장르적 파생과 변형을 꾀하며 관객을 스크린으로 초대했다. 1895년 세계 최초로 상영된 <열차의 도착>은 다큐멘터리였다. 단순히 열차가 도착하는 3분여의 불과한 이 영화는 당시 관객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영화를 선택하는 관객의 기호도 점차 변하기 시작했고,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기만 한 다큐멘터리는 더 이상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반면 문학과 허구를 토대로 한 극영화는 수많은 장르를 파생시켰는데 SF, 호러, 뮤지컬, 스릴러, 웨스턴, 코미디 등 나열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그 수가 많다.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는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파생된 장르가 극히 드물었다. 때문에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변형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1984년에 개봉된 로브 라이너의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가 대표적인 다큐멘터리의 변형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를 가장한 허구장르로 영화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마치 실제인 것처럼 가장한 장르다. 이후 <블레어윗치> <클로버필드> <파라노멀 액티비티>에 이르면서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장르를 페이크다큐(fake documentary) 또는 모큐멘터리(mockumentary)라고 부른다. 페이크다큐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가장 우아한 접점에 있는 장르인 셈이다.

장르는 소재와 형식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한다. <그래비티>는 페이크다큐처럼 다큐멘터리가 지닌 리얼리티와 극영화가 지닌 드라마적인 요소를 가장 잘 버무린 영화로 실제로 알폰소 쿠아론의 의도는 <그래비티>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고 그 의도는 상당 부분 성공했다. 더불어 하나의 장르로 귀속되지 않으려는 숨겨진 장치들은 오프닝을 통해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비티>는 익스트림 롱 숏으로 시작한다. 즉,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풍광을 화면 가득 담아내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우주를 유영하는 카메라는 이윽고 주인공을 클로즈업 하더니 이내 헬멧 안으로 들어가 1인칭 시점으로 전환한다. 이후 카메라의 시선은 다시 전지적 시점으로 선회한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을 때 허구마저 사실로 받아들이기 쉬운 점을 이용한 것이다. 괄목할만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이 단 하나의 숏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20여분의 롱테이크는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며 영화적 체감을 궁극으로 이끌어내는데 기여했다. <그래비티>가 그 어떤 장르보다도 사실적으로 보일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그래비티>는 페이크다큐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SF로만 치부하기에도 난해하다. <그래비티>의 공간은 SF지만 형식은 다큐멘터리를 표방하고 있고 분절된 호흡은 서스펜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지금 <그래비티>의 장르를 하나의 범주에 귀속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모든 장르에는 시초가 있듯 훗날 <그래비티>는 앞으로 파생될 장르 영화 가운데 그 시초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분명한건 페이크다큐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비티> 역시 장르적 대안을 모색한 영화라는 것이다. <글쓴이 박길홍>

그래비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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