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나는 초등학교를 삼수만에 입악해으니, 얼마나 “멍청한 놈”으로 취급당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어이없는 일이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말을 배웠고, 우리말로 의사 표현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없이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입학 면접을 앞두고서야, 일본말을 모르면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다 다를까. 면정ㅂ장에 갔더니 면접관 선생님께서 그림책을 펄쳐 놓으시고 손가락으로 지적하는 동물그림을 보고 일본말로 대답을 하라는 것이다.

개, 돼지, 닭 같은 우리 주변에서 늘상 보이는 동물이름은 어느 정도 외우고 갔지만 선생님은 하필이면 나에게 코끼리를 지적하셨다.

코끼리를 일본말로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어 대답을 하지 못한 나는 그만 낙방을 하고 말았다. 다음 해에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였건만 선생님께서는 기린을 지적하시는 거였다.

기린을 일본말로 뭐라고 하는지 알지 못해 대답을 못한 나는 또 다시 낙방을 하였다. 사실 기린은 우리말이나, 일본말이나 똑같이 기린이었다.

그 당시 나는 그걸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 두 번이나 낙방하고 삼수만에 입학을 했으니, 그 시절의 초등학교 입학문이 얼마나 좁았는지 짐작할 것이다.

그 때는 제주시내에 제주북초등학교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제주남초등학교도 있었지만, 일본일 학생만 입학가능한 학교임.)지원자 모두를 받아 들이지 못하여 부득이 이렇게 면접시험으로 골라서 입학을 시킨 것이다.

초등학교에 이렇게 어렵게 입학하게 된 나는 여러 가지 학교 방침에 철저하게 따라해야만 했다.

학교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직원실 앞 국기게양대에 걸려 있는 일본국기『히노마루』를 향하여 90도로 허리굽혀 절을 하고, 절도있게 걸어 들어가 동쪽에 있는 봉안정(신사)를 향하여 다시 한 번 90도로 절을 한 다음에야 마음대로 운동장을 뛰어다닐 수 있었다.

봉안정속에는 천황폐하의 교육칙어를 봉안해 두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절을 하고 지나가야 했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발견되면 처벌을 받아야 했다.

교육칙어라는 것은 마치 우리의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것으로서, 입학식 같은 중요한 조회 때나 국경일에는 꺼내어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 앞에서 봉독했다.

교실에 들어가면 교실 정면에 일본 천황폐하가 사는 황궁 입구 이중다리(니주바시)사진이 걸려 있다.

그 사진을 향해서도 90도로 절을 하고 나서야 제 자리로 가서 앉을 수 있었다. 학교에 등교한 후에는 우리말을 사용해서는 절대로 안되고, 만일 우리말을 쓰다 들키면 또한 엄벌을 받아야 하니 늘상 말조심을 해야 했다.

또한 조회때와 기념식 때에는 반드시『황국신민의 선서』를 소리높이 합창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나는 일본국민”이라는 뜻이다. 나는 제주북교에 입학하는 날부터 우리 고향 노형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향 선배들은 각 학년마다 우등생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전교생을 지휘통솔하는 대대장은 고향 선배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입학식날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였는데 그 앞에서 긴 칼을 차고 나와 구령을 붙이는 대대장은 고등과 2학년생인 우리 동네 Y 선배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초등학교 6학년 졸업 후에 희망에 따라 고등과 2학년까지(중학2한년 과정)다닐 수 있었고, 전체 학생 통솔은 고등과 2학년생인 대대장이 맡고 있었다.

중요한 국경일에는 반드시 군대식 사열 분열을 하였고, 그때마다 Y선배가 긴 칼을 차고 나와 전체 학생을 지휘하였다.

1년 뒤, Y 선배가 졸업을 하자 이번에는 나의 친족 형님인 H선배가 대대장이 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역시 우리 동네 K선배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K선배의 대대장 직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래도 고향 출신 선배들이 항상 선두에서 지휘봉을 드는 것을 보면서 자부심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때였고, 일본은 동남아로 진군하여「싱가폴」을 함락시켰다.

동네마다 축하걸궁을 벌였고, 학생들에게는 고무공을 기념선물로 나눠주곤 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민주에 주둔하던 관동군이 제주도로 옮겨 와서 제주섬은 온통 일본군인으로 가득 찼다.

우리는 제주비행장을 조성하는데 깔게 되는 잔디를 할당받아 등교할 때에는 잔디 5장씩을 짊어지고 등교해야만 했다.

우리는 등. 하교 때조차 열을 지어 걸어야 했고, 일본 군가를 우렁차게 부르며 씩씩하게 행진했다.

전쟁이 막바지로 갈수록 제주상공에서는 공중전이 벌어졌다. 제주주정공장은 폭격으로 불에 탔고, 목포로 가던 연락선도 공격을 받아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어수선한 나날이 계속되던 여름의 어느 날(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해서 우리 나라가 해방되었다고 사람들이 기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두렁청(어리둥절)해졌다. 어제까지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으로 불리며 일본 국민으로 살아왔는데, 하루 아침에 「현임종」이라는 우리말 이름으로 불리는 한국사람이 되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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