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우리 조상들은 여럿이 계를 조직하여 상부상조했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케왓(계밭)을 운영한 것이다.

혼자 힘으로 마련하기 힘든 넓은 촐왓(풀밭)을 여러 사람이 한 데 모여 계를 만들어 운영했다.

일본 식민지 시절 토지를 세부측량하게 되었는데 그 측량비용이 밭 가격과 맞먹을 정도로 엄청났다.

우리 조상들은 그 비용을 부담할 능력이 없어 재력가인 우리 종씨 현경호 씨에게 하소연하게 되었다.

현경호 씨는 측량비용을 대고 케왓은 현경호씨 명의로 소유권 이전하되, 영남목장 조합을 조직하여 운영(활용)권을 영남목장 조합에 50년 간 무상임대 해준다는 약정을 했다.

영남목장 조합에는 노형주민 50%, 연동주민 30%, 도두, 용담, 이호 주민 20% 정도로 가입되어 있었고, 몇 십 년 동 안 아무 탈 없이 잘 운영되었다.

우리 나라가 해방되고 제주 4.3사건이 벌어지자 현경호 씨 부자는 서북청년들이 살해하여 버렸고, 현경호 씨의 작은 아들은 행방불명되었다.

4.3사건으로 조합원 중에는 소, 말 등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이 대폭 줄어들어 목장을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목장은 방치되어 버렸다.

목장토지의 소유권자인 현경호 씨가 없음을 이유로 몇몇 사람이 그 재산을 노리게 되었다.

목장짱을 현경호 씨에게 영남목장 소유로 돌린 다음 팔아먹을 궁리를 해서 법원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이 벌어지자 조합원들 가운데 현씨 종친들은 괸당(친족)을 상대로 소송하는 것에 분노하였다.

그래서 소송비용부담금을 안 냈고, 비용부담을 안 한 사람에 대해서는 조합에서 제명하는가 하면 헐값으로 지분을 사 모아 부동산 투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아버지도 팔아버리겠다는 것을 못 팔게 하고 소송비용을 분담하면서까지 그냥 가지고 있었다.

한편 제주도청에서는 목장 토지 1/3쯤을 가족묘지로 조성하여 민간에 분양하면서 지주에게 토지봉상을 하려 했으나 소송으로 분쟁중이었기 때문에 법원에 보상비를 공탁해 버렸다.

현경호 씨의 생존해 있는 막내 동생은 다른 집으로 양자간 상태여서 법적으로 권리가 없기도 했지만, 경제적 여유도 없어 제기된 소송에 응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그냥 내버려 둘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먼저 현경호 씨 동생을 찾아가 법원에다 『부재지주관리인』신청을 하도록 알려드렸다.

부재지주관리인이란, 관리만 하지, 매각이나 처분할 권리는 없었으나, 법원 소송에 응할 자격을 가질 수 있었고, 도청에서 법원에 공탁한 보상비를 인출할 자격이 생긴다.

경제적으로 옹색한 동생은 보상금 인출로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소송에도 응수할 수 있게 되어 활기를 띄었다.

소송을 제기한 측에서는 20년 시효 취득이 가능하다며 승소를 장담했었다.

하지만, 제주도청 문서고에서 현경호 씨와 영남먹장 간에 체결한 50년 기한의 계약서가 발견되었다.

1심 재판에서 현경호 씨 측이 승소하자, 변호사는 ‘승소한 토지의 1/3을 승소한 보너스로 달라.’고 요구해 왔다.

정당한 소송비용을 주고 고용한 변호사인데 무슨 보너스를 요구하냐고 해임하였다.

2심은 광주고법에 가야 하므로 목포에 살고 있는 P 변호사에게 의뢰하였다.

그러나 이 P 변호사는 광주고법에 몇 번 다녀오고는 정작 결심공판 때에는 그 날짜를 잊어먹고서 결석하여 현경호 씨 측이 오히려 패소할 위기에 처했다.

이 때 영남목장측 인사가 나에게 합의로 재판을 끝내자고 제의해 왔다. 대법원까지 가더라도 영남목장 쪽은 승소할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합의를 제안했고, 현경호 씨 측에서도 계속 재판만 하다 보면 변호사들 배불리는 일만 생길 듯하여 합의하는게 좋겠다는 결론을 서로 내리게 되었다.

① 제주도청에서 법원에 공탁한 공탁금은 현경호 씨 동생이 갖는다.

② 나머지 토지는 반씩 나누어 갖는다.

③ 영남목장은 현경호 씨의 공적비를 세워준다.

이렇게 합의하여 영남목장 소승을 합의로 종료하였다.

그래서 기회를 얻은 영남목장 사람들은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지분을 모두 팔아버려 할 수 없이 마지막까지 버티던 나도 팔고 말아, 더 이상 『영남목장』이라는 이름은 지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언제 이 드넓은 땅을 사 모을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결국 합의서의 ③항 공적비를 세운다는 것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세월이 한참 흐른뒤 행방불명되었던 현경호 씨의 작은 아들이 일본에 생존해 있다는 것과 조총련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서북청년들에게 아버지와 형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도망간 사람이니 조총련계가 될수밖에....... 한. 일 국교가 정상화된 뒤 내가 일본에 가게 된 기회에 그 아들에게 전화로 만나자고 연락했으나 그 쪽에서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2년이 더 경과한 뒤 또 다시 일본에 가게 되었을 때, 전화로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달래며 제안을 했다.

"조총련계 동포 모국 방문단으로 한 번 고향에 다녀가세요. 옛날과 달리 고향에 오셔도 기관에서 절대 건드리지 않습니다.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당신이 상속받아야 할 엄청난 재산에 대해 모든 권리를 내던져 버리시겠습니까?"

그리고 민단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내 고등학교 동창생에게 조총련계 동포 모국방문단에 끼워 그 분의 모국방문을 성사시켜줄 수 있도록 신신당부했고, 본인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고 돌아왔다.

얼마 후 정보부에서 “그 분이 이번에 고향에 들어오니, 특별히 잘 모시세요.” 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있는 친족들을 모두 데리고 비행장까지 마중나갔고, 고향집에 돌아온 그는 자기가 일본으로 밀항 떠날 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집에 도착하여 벽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자 마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날 저녁 나는 괸당(친족) 모두를 탑동횟집으로 모시고 가 환영회식 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고향에 오기만 하면 잡아 죽일 줄 알았다.” 라고 하면서 나를 중앙정보부의 끄나풀인 줄 오해했었다고 사과했다.

“몬딱(전부) 잃어버릴 영남목장 땅이주만, 절반이라도 유지시켜 드리게 되어 다행이우다.(다행입니다.)” 나는 그렇게 위안을 드렸다.

그 후로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자 마자 민단으로 전향하여 족박에 쥐 나를 듯이(쥐가 쪽박에 있는 음식 먹으러 들락날락하는 모양) 고향을 다녀가고 있으니, 이 땅에 진실로 평화가 왔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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