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나에게는 초대라는 말이 몇 개 붙어 다닌다.

초대라는 말을 떠올리면 역시 그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나고, 힘들었지만 기분좋은 뿌듯함이 있다.

굳이 초대라는 단어를 붙이기는 뭐하지만, 해방 후 신성여자중학교가 개교하여 그 첫 수업의 첫 시작종을 친 것은 초대급사였던 나였다.

나는 당시 오현중야간생이었지만 내가 다녀야 할 학교에는 등교하지 않고, 주로 신성여중 야간분(당시 신성여주도 주.야간이 있었음) 학생들이 공부하는 맨 뒷자리에서 수업을 받으며 급사생활을 했으니 여학교에서 배운 (졸업장만 없는)남학생인 셈이다.

세월이 흘러 기업은행 지점장시절 본점에 지점장회의 참석차 출장갔다가 명동성당에서 미사 참례하고 나오는 길에 한일관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 곳에서 재경 신성동창회 모임이 있다며 신성 출신들이 모여 들다가 우연히 나와 마주치자 함께 들어가 모임에 참석하자고 권했다.

회의가 시작되어 사회자가 참석 은사를 차례로 소개하다가 내 차례가 되자 우물쭈물하며 어려워하는 눈치가 보이기에 내가 자진해서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 기업은행 제주지점장이지만, 이 자리에서는 신성여중 초대 급사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참석한 다른 선생님들은 몇 년 간 근무하다 신성을 떠났고, 여러분들도 3년 공부하고서 신성을 떠났지만, 나는 지금 현재도 신성학원 감사로 신성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신성여중 청 시작종을 쳤기 때문에 신성여중이 개교되었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선생님들이나 여려분들도 신성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참석자들은 모두 와~ 와~ 하며 박수를 쳐 주었다.

내 다음 급사직을 이어받은 2대 금사 이기용 박사는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정년퇴임했는데, 고향에 올 때마다 초대급사인 나와 당시 교무주임이었던 이기형 선생님을 모시고 점심을 사 주고 있으니, 신성여중 초대급사 대우를 톡톡히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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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제주교구가 창설되고 나서 나는 초대 천주교 제주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장이라는 감투를 썼다.

교구 창설 초창기라 교세가 약하고 인적. 물적 자원이 모자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교구장 현 대주교님 착좌식을 비롯하여 현 대주교님 서거, 최정숙 전 교육감님 서거, 박정일 주교님 착좌식 등 큼직한 행사와 연례적인 신앙대회를 치르느라고 주로 지금의 중앙성당 간부 신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이제 생각해 보면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교세도 커지고 각종 자원도 여우로우니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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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보증기금 제주지점 초대 지점장 발령을 받고 새로 사무실을 마련하느라 많은 애를 먹었다.

제주은행 본점 4층에 사무실을 임대하고 업무를 시작했는데, 내 소원은 보증계약고 100억원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도 어려웠다.

신제주에 제주지점 사옥을 지으면서도 수지면에서 독립채산을 맞추지 못하여 참으로 많은 괴로움을 느꼈다.

제주도내 중소기업 활성화를 위해 신용보증기금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요청되었던 시기였기에 용기를 잃지 않고 노력했다.

2012년 말 현재 신용보증기금 제주지점의 보증실적이 3척억원이 넘었다 하니 꿈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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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라기 하기보다 처음이라고 한다면, 나는 우리 나라 국군 창설이래 처음으로 부상에 의해 명예제대한 사람이다.

6.25 남침 전쟁이 터지자 1950년 9월1일, 육군에 입대한 나는 전투가 한창인 12951년 2월 6일, 적의 총탄을 맞고 부상하여 육군병원 생활을 했다.

1951년 5월 23일 명예제대한 나는 제주도 출신 7명과 함께 귀향했다.

명예제댜한 우리 8명이 제주여객선 부두에 도착하자 경칠악대가 나와 환영연주를 했고, 도지사를 비롯한 기관장들이 부두까지 나와 화환을 목에 걸어 주며 환영해 주었다.

우리 나라 국눈 창설 이래 처음 실시한 명예제대였다.

그에 내가 포함되어 살아 돌아온 것도 기뻤고, 명예제대한 보람도 컸다.

2013년 6월 25일 6.25기념 행사를 마치고 회식자라에서 나는 이런 농담을 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당신들은 모두 나의 후배가 됩니다. 학교에서는 먼저 졸업한 사람이 선배가 되지 않습니까? 나는 1951년 5월 우리 나라 국군 창설 이래 맨 처음 명예제대하였으니, 나 이전에 제대한 사람은 하 사람도 업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일행들은

“그 당시 우리들은 군대에서 4~5년씩 복무했는데, 당신은 부상단한 것이 오히려 행운이었군요.”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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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해방 후 한라산 등산을 가장 먼저 한 사람 가운데 내가 끼어 있다.

1947년 이후 제주 4.3사건으로 한라산 입산이 완전히 금지되어 있던 1952년 여름, 식물학자이며 만장굴 발견자인 부종휴 선생님이 제주 미국공보원 장 홍완표씨의 지원을 받아 식물채집을 이유로 경찰에다 등산허가를 얻어냈다.

4.3사건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한라산 입산에는 겨찰서장의 등산 허가와 신변 보호를 위한 무장경찰관 2명이 배정되었다.

부종휴 선생은 제주 미국공보원 사무실인 관덕정 건물안에서 5일 동안의 동산계획을 세우며 미국공보원에 근무하고 있는 나를 등산 일행으로 끼워 주었는데 나는 가장 나이가 어렸다.

자동차도 없었지만 차 다닐만한 길도 없던 그 때여서 우리는 관덕정에서부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출발하여 불타 없어져 버린 관음사 터에서 첫날밤, 용직각 계곡에서 이틀째 밤, 백록담에서 삼일째 밤, 영실에서 사일째 밤을 보내고 5일만에 어리목으로 하산했다.

4.3사건으로 입산 통제되었던 한라산은 완전히 잡목과 가시덤불로 얽혀 있어 정글이 되다시피 했다.

새로 길을 개척하면서 등산하느라 전진이 더뎠다.

이 등산이 나에게 큰 경험이 되어 그 되로 4.3사건이 완전히 끝나고 한라산 입산통제가 해제되자 등산하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그때마다 등산 안내원 격으로 앞장서서 등산을 했다.

백록담 서북벽의 험준한 암벽에 내가 직접 징으로 쪼아 손밥을 홈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의 한라산 등산로 모두가 부종휴, 김종철 두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우리가 개척해 둔 코스라고 보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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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협중앙회 기획조사부 근무 당시 지금 농협중앙회 제주지역본부의 전신인 제주출장소 기구 신설하는데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5.16 혁명후 농업은행에서 기업은행과 농협이 분리되어 새출발하면서 전라남도지부 소속으로 되어있던 제주농협을 농협중앙회 제주출장소로 독립시켜 개설할 때 나도 서울 중앙회 기획조사부를 버리고 제주출장소로 내려와 초창기 어려운 문제 해결에 적극 노력했다.

농협중앙회 제주출장소를 제주지부로 승격시키는 일, 모자란 인원 T/O를 늘려 인력을 확보하는 일, 예산을 타 도와 대등하게 배정받도록 만든일, 제주지부 사옥을 신축하는 일 등은 아마도 다른 간부들 노력보다 내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특히 유채 처리에 어려움을 겪을 때, 『유채위탁가공』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내 아이디어는 이제 생각해도 자랑하고 싶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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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행 제주지점장 시절 제주시금고 취급은행 책임자로서 제주시 공과금 납부방법을 개선한 나의 아이디어가 오늘날 우리 나라의 각종 공과금 납부체계로 발전한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

당시 시민들은 시금고인 기업은행에서만 세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민의 납편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도내 전 금융기관에서도 수납할 수 있도록 확대하는 제도 개선을 연구하고 단행하였다.

이로써 전국의 각시군구 세무 담당자들이 제주시와 기업은행 제주지점으로 실무견학을 올 정도였으니 어깨가 으쓱했었다.

오늘날에는 우리 나라에서 아무 은행에서라도 모든 자치단체의 세금을 납부할 수 있지만,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내가 지금의 공과금 납부제도를 개척한 원조였다는 것을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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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오현고등학교 총동창회 기틀을 만든 데에는 역대 회장님들 역할도 컸지만, 특히 김병찬(한라병원 및 한라대학교 이사장)회장과 내 역할이 컸다고 해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내 생애에 있어서 김병찬 회장의 탁월한 리더쉽과 내 아이디어가 잘 맞아 떨어져 오현고 총동창회뿐 아니라 서울대학교 제주도 총동창회 그리고 제주 로터리 클럽 등에서 보람된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나는 대학 재학생 때부터 서울에 유학중인 오현고 출신들을 규합하여 조작한 현경회와 오현고 출신 서울대생 모임인 광풍회등에서 김병찬 회장을 모시고 일하기 시작했다.

이런 인연으로 1979년 오랫동안 침체된 오현고 총동창회를 재건하면서 김병찬 회장을 추대하고 나도 부회장직을 맡아 총동창회를 다음과 같이 혁신하기 시작했다.

① 회원명부를 만들어 회원의 소재지를 파악했고

② 매월 동창회지인 『현우』지를 창간하여 회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③ 전산시스템을 도입하여 회원동정을 일원화했고

④ 연회비제도를 도입하여 재정안정을 도모했고

⑤ 각 회기별 지역별 동창회를 활성화시키는 데 노력했다.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매월 동창회보를 발행하는 고등학교 동창회는 없을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학교 출신들이 오현고 총동창회 활동을 따라가려 아무리 노력해 봐도 도저히 잘 안되더라고 푸념 반, 부러움 반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부심을 느낀다.

1981년 1월 21일 나는 신제주로터리클럽을 창설하고 초대회장직을 맡았다.

나는 당초 제주로터리클럽 재무, 총무직을 맡으면서 일본 센다이로터리클럽과 국제교류에 힘써왔다.

제주로터리클럽에서 신제주로터리클럽을 창립하는 스폰서를 맡아 추진하고 있는데, 로티리클럽 경험자가 한 사람이라도 가야 한다는 요청에 의해 총무인 내가 가게 된 것이다.

로터리클럽은 국제적인 봉사단체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으나 제주에서는 겨우 제주, 서귀포, 동제주 3개 클럽뿐이었고, 계속 확대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나는 신제주로터리클럽 초대회장으로서 1982년 5월 20일 한림로터리클럽을 스폰서하여 창립하는 등 제주도 로터리클럽의 초창기 활성화에 온 정열을 쏟았다.

현재 제주에는 클럽 수가 59개이고, 2014년부터 3662지구로 독립하게 된다고 한다. 나는 지금 은퇴한 입장이지만, 내가 몸담았던 로터리클럽이 오늘날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쁘기 한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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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보니 내가 처음인 일과, 처음으로 아이디어를 내어 일으킨 일들이 결과적으로 잘 되었고 더욱 더 활성화되어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을 지켜보면서 매우 보람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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