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2011년 11월초, 조선일보를 읽다 보니 2011년 11월 11일 11시 11분에 11사단 출신 장별들이 강원도 홍천의 사단본부로 모여 축제를 연다고 보도되었다.

나는 60여 년 전인 1950년 9월 1일 입대하여 대구에서 11사단을 창설할 때 사병으로 참여하여 11사단 9연대 2대대 6중대에서 복무했다.

대구의 어느 방직 공장에서 사단이 창설되었고, 미국에서 금방 들어온 M1총을 배급받아 구리스(기름)가 잔뜩 묻은 총을 분해소제하여 검사총을 여려 번 되풀이 훈련하다 보니 내 왼손 엄지손가락 등치가 벗겨져 피가 났다.

나중에는 무거워서 M1총을 들지도 못해 애를 먹었는데 높은 분들이 러닌(만 16세)나를 불쌍히 여겼는지 중대장 연락병으로 보직하고 칼빈총으로 교체해 줘 고생을 덜었다.

9월 15일 밤 우리는 왜관을 건너 김천 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김천사는 뾰족성당 하나만 보일 뿐 온 시가지가 파괴되어 몰골이 아니었다.

하늘에서는 경비행기각 빙빙 날아 돌면서 삐라를 뿌렸다.

내용은 “오늘 아침(9월 15일) UN군과 용감한 우리행병대가 인천에 상륙했다.

지금 서울로 진격중이다. 낙동강 변으로 내려온 인민군 여러분들은 퇴로가 막혔으니 즉시 항복하라!“ 라고 씌여 있었다.

이 삐라를 본 우리는 사기충전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 이후의 진군상황은 수월했다. 퇴로가 막힌 적군은 도망친 부대의 경우는 별다른 저항도 없이 항복하여 우리 중대는 하루에 2~3백 명씩 포로를 잡았다.

포르를 잡고 몸수색을 해보면 시계를 서 너개씩 차고 있거나, 주머니마다 폐물들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아마도 서울 등 점령지에서 잘 사는 집이나 백화점 등에서 물건을 털어 수중에 집어넣은 모양이다.

군복을 입고 있다고 해서 다 인민군인줄 알았는데, 군복만 입혔지 민간인 신분인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인민군이 점령하면 그 지역 군수, 면장, 내무서장(경찰서장), 초등학교,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받고 함께 내려온 자들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북한이 계회적으로 남침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포로들 물품중에 손수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남침 후 점령지의 여중학생(당시는 중학교가 6년제였음)들이 보낸 위문품 가운데 『어느 여중 몇 학년 아무개』라고 수놓은 손수건이 많이 있음에 아연실색했다.

북에서 내려온 교장들이 학생들에게 “위대한 인민군 장병에게 위문품을 보내자!”라고 하여 만들도록 지시한 것인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한민국 중학생들이 인민공화국이 다 되었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북한에서 중학교 다니다가 인민군에 입대했다는 곱상하게 생긴 소년병(나와 동갑이었다.) 포로 하나는 우리 중대장이 포로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중대장 잔심부름꾼으로 함께 데리고 다녔는데, 착실하게 말도 잘 듣고 심부름도 잘하여 귀염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 부대가 강원도 간성의 최일선 동부전선으로 진격 하고 보니,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분명히 월북한 것으로 여겨지니 역시 그도 북한 인민군인 것이 확실했다.

1951년 2월 6일(음력 설날) 오후 5시, 나는 북한 인민군에 의해 다리에 총탄을 맞은 채, 얼음판 위를 기어서 다음 날 아침 6시경에야 13시간만에 아군부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다리에 총을 맞은 기후 큰 바위 아래의 틈새로 기어들어간 나는 숨어 있으면서 몰려온 인문군들이 벌이는 만행을 지켜볼 수 있었다.

“저 국방군 개새끼가 꿈틀거린다. 확인사살 해!” 하는 소리가 내가 숨어 있는 곳 아주 가까이에서 우렁차게 들렸고, 인민군 졸병들은 날뛰는 사냥개 모양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부상당한 아군의 양 눈과 심장을 장총 앞에 꽂아진 세모꼴 꼬챙이로(아군 총앞은 총검, 인민군 장총앞은 꼬챙이임)수써 찔러 확인사살을 했다.

한 시간 정도 발광하던 인민군은 “국방군 개새끼들이 반격해 올 지도 모르니, 제 진지로 퇴각한다.!” 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인민군들은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하는 적기가와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며 유유히 떠나갔고 노랫소리도 멀어져 갔다.

그제서야 살금살금 바위 밑에서 기어 나와 보니 명령을 내리던 인민군 지휘관은 내가 숨어 있던 바위위에 서서 지휘했었고, 졸병들이란 높은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습성이 있다 보니 내가 숨어 있던 바위 밑은 수색하지 않아 발각되지 않고 안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방향감각을 잃어 어디로 향해야 아군 진지로 갈 수 있을지 어리둥절했다. 드디어 어리음 땅바닥에 남아 있는 군화의 발자국(인민군은 운동화같은 것을 신었다.)을 더듬어 아군 발자국이 향한 방향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아군에서는 낙오병들을 집결시키기 위해 야광탄을 쏘아 올리게 되어 있지만, 뒷날 새벽 5시까지도 야광탄 신호는 올라오지 않았다.

우리 부대가 그 때까지 정신을 못차린건지, 야광탄 올렸다가 오히려 적의 집중 포공격을 받을까 둬려워서인지 알 수 없었으나 밤새 산 속을 헤매고 있던 나로서는 답답하기만 했다.

한겨울의 오밤중 13시간을 얼음판 위를 기어서 간신히 아군에 합류하고 보니 사지가 온통 동상증세를 보여 꼬집어도 아픈 줄 몰랐다.

총 맞은 다리는 물론이고 양 손도 마비증세가 있어 누가 업으려 해도 팔로 감아쥐는 동작 자체를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게꾼이 나를 지게에 걸쳐 태우고 새끼줄로 묶어 짊어지고 험한 산길을 하루종일 걸어서 큰 길가로 내려와 군용트럭에 실어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육군병원에서 몇 개월간 치료를 끝마치고 원대복귀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날 명예제대시켜주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나와 11사단과의 인연은 끝나고 말았다.

나는 조선일보를 읽고 위와 같은 추억이 되살아나 이메일로 나의 추억을 담은 메시지를 11사단으로 보내고 격려했다.

나의 메시지를 받은 11사단에서는 사단장 이하 행사운영요원들이 우리집으로 이메일과 전화를 걸어와 그 행사에 올 수 있도록 항공권을 보낼터이니 참석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개인 사정으로 끝내 그 행사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11사단 장병들에게 나의 메시지하나로 사기가 오르고 격려가 되었다면 큰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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