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성당신자들이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천주경 첫 구절에서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어린 나이에도 고민을 맣이 했다.

그 구절이란 당시의 천주경으로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신 자여......』로 시작하고 있었는데 우리 풍속에서는『아비』라는 단어가 점잖게 사용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누가 버릇없이 행동하면 “애비, 애미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욕할 때 쓰는 말이었으니, 천주경 첫머리에 그런 단어가 들어 있어서 오랫동안 거부감을 느껴 왔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바르게 고쳐 놓아 내 마음이 흐뭇해 진다.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200여 년 전이므로 그 당시 각종 기도문을 중국어에서 우리말로 번역하다 보니 지금 우리 말과 달리 어렵게 번역되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세례받은 한참후에 까지도 어째서 예수님을 고양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주의 고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하고 기도할 때마다 분심이 생겨 예수님과 고양이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고 의문을 풀지 못하여 고민을 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귀엽게 부를 때 『우리 강아지』라 고 부르는데, 예수님 시절 그 나라 풍속으로는 강아지 대신 공양이라고 불렸구나....하고 내 마음대로 해석하여 이해했다. 뒤늦게 알고 보니 『천주의 고양』은 『천주의 어린 양』이라는 말이었고, 어린 양이라는 표현을 어릴 고 양야의 한자음으로 불렀기 때문에 철부지인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예수님을 고양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또 한가지 부끄러운 오해 중 하나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태중』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모경에서 “태중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태중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게 어미니 배속에 있는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그 뿐이 아니다. 성당에서 『성시간』이있다고 할 때, 성당에서도 성교육을 시키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성 시간을 잘못 알고 있었음을 알고서는 혼자 창피함을 느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성탄찰고』가 있었고, 성탄찰고에 함격하기 위해서 열심히 요리문답과 십계명을 외워야만 했다.

특히 서양 신부님들은 글자 하나라도 틀리면 불합격처분하여 다시 공부하고 오라고 돌려 보내니 나는 불만이 많았다.

뜻을 이해했으면 되었지, 글자 하나하나까지 외울 필요가 있을까 해서 나는 신부팀과 자주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예를 들면 십계명중에서

신부님 : 하느님은 몇이뇨?

나 : 예, 일흔 하나입니다.

신부님은 눈을 크게 부릅뜨며 내 머리에 알밤을 선사한다.

신붐 : 어째서 하느님이 일흔 하나이냐?

나 : 십계명 일은, 하나이신 하느님을 만유위에 공경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첫째계명은 하나이신 하느님을....하는 뜻인데, 일, 이, 삼으로 순서를 부르다 보니 어감상 『일흔 하나』로 된 것임)

신부님도 어이가 없어 웃었다.

신부님 : 십계명 4는 무엇이냐?

나 : 사는 부모님에게 효도하고....죽은 보모님에게는 효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부님은 또 한번 내 머리에 알밤을 날린다.

신부님 : 십계영 5는 무엇이냐?

나 : 오는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는 사람은 죽여도 좋습니다.

신부님 : 십계명 7은 무엇이냐?

나 : 칠은 도둑질을 하지 말고, 다른 물건은 도둑질해도 됩니다.

신부님은 하도 어이가 없어 알밤주는 것도 잊어버리신 모양이었다. 내가 십계명의 뜻을 모두 알고 있음을 느끼신 것이다. 이때다 싶어 신부님께 건의를 했다.

“뜻을 이해하거든 찰고 합격을 시켜 주셔야지, 글자의 토씨 하나하나까지 외워오라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신부님께서는 내 말 뜻을 이해하시고 그 다음부터는 찰고가 쉬워젔으니 참다행이다,

이제는 『찰고』라는 단어조차도 잘 사용하지 않고, 찰고제도도 없으니 격세지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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