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EXO)'팬의 어긋난 팬심, 연인과의 사랑 모두 생채기로 남아
성숙한 관광 문화, 처벌 규정 없이는 불가능한가?

▲ 여미지 식물원

중국의 만리장성,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성당, 스위스의 카펠교 등 각 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한국어로 표기된 '낙서'가 있다는 점.

심지어 독일 하이델베르크 학생감옥에는 한국어로 된 낙서금지 경고문이 붙었다. 어글리 코리안(Ugly Korean)이라는 불명예를 얻을 수밖에 없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비단 해외관광지만의 얘기가 아니다. 도내 관광지 또한 낙서로 인해 몸살을 앓은 지 오래다. 이러한 관광지 낙서들 중 가장 심각한 사례가 있다면 바로 살아있는 식물에 가하는 행위다.

제주도는 청정 자연의 보고인 만큼 식물원, 수목원 등 자연을 테마로 한 관광지가 인기다.
현재 이 인기 관광지에는 식재된 식물의 수만큼 인기 관광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심으로 가득하다.

# 어긋난 팬심, 연인과의 사랑 고스란히 생채기로 남아

현재 도내에 자리한 수목원 및 식물원은 4곳으로 제주시에는 한라수목원, 한림공원, 방림원, 서귀포시에는 여미지 식물원이 자리하고 있다.

중문관광단지 내 자리한 여미지 식물원은 1989년 개원 후 올해로 26년째를 맞았지만 단 한 번도 식물원 내 낙서가 끊긴 적이 없다.

여미지는 올해 세월호 사고의 여파로 인해 관광객의 발길이 반으로 줄었다. 그러나 지난해만 해도 45만여 명이 여미지를 찾는 등 제주 도내에서는 인기 관광지로 꼽힌다.

여미지가 인기관광지로 손꼽히는 이유는 꽃, 열대 및 아열대식물, 선인장, 수생식물, 다육식물, 자생식물 등 천여 종에 달하는 다양한 식생의 분포로 눈요기뿐만 아니라 학습의 장으로도 활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미지 곳곳에는 값 비싼 추억을 남기기 위해 스쳐간 아픈 손길들이 가득하다.
여미지 식물원 내 낙서로 인한 생채기가 나 있는 식물은 대나무, 아레카야자, 용설란, 아가베, 파키라, 야자종류 등이다.

주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이름,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 자신의 이름과 날짜 등이 식물들의 표피와 수피에 새겨졌다.

▲ 여미지 식물원 내 낙서로 가득한 아가베의 모습. 아이돌 가수 그룹 엑소(EXO)의 이름이 눈에 띤다.

새기는 방법도 다양하다. 식물 등에 난 가시를 훼손해 두 번 생채기를 내거나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펜과 자동차 열쇠 등 날카로운 물건들은 모두 무기가 된다.

사람으로 치면 피부를 찢어 상처를 내는 것과 다름없다. 이 상처는 식물이 자라면서 더 깊이 파고들며 점점 더 진해진다. 그렇게 그 고통을 고스란히 전한다.

천지연폭포 내 천지연휴게소에 자리하고 있는 용설란 또한 10년째 천지연폭포를 찾는 관광객들의 방명록 노릇을 하느라 제 몸이 성치 못하다. 어찌나 오랜 기간 상처를 입었는지 성한 부분이 없다. 그래도 버텨주고 있는 그 생명력이 고마울 지경이다.

▲ 천지연폭포 내 천지연휴게소 옆 자리한 용설란 ⓒ뉴스제주

이밖에도 한림공원의 선인장, 한라수목원의 수목 등도 인간의 욕심과 무지 앞에 무사하지 못한 실정이다.

# 비윤리적 행위임에도 제재할 수 없는 이유?

식물 표피나 나무 수피에 새겨진 낙서는 생장 과정을 거치며 더욱 진하게 남는다. 이러한 비윤리적 행위는 보는 사람들에 불쾌감을 주기 십상이나 이를 제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미지 식물팀 조은경(35)씨는 "식물원 내 낙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며 말문을 열었다.
조 씨는 올해로 여미지 식물원에서 근무한 지 10년이 됐다. 그는 10년간 봐왔던 일 앞에 너무도 덤덤했다.

조 씨는 "최근 6개월간 수학여행단 등 방문객이 줄며 낙서가 줄어들었다"며 "그나마 낙서를 하는 것도 1만 명중 1~2명 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이어 조 씨는 "현장을 목격한 적도 없지만 사실상 낙서를 하고 있는 현장이 발각되더라도 '하지 말아 달라'는 권고 밖에 할 수 없다"며 마땅한 방안이 없음을 피력했다.

특히 관광지 특성 상 관광객의 비위나 감정이 상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 자제하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조 씨는 "낙서가 된 식물은 일부분이라 전체적인 이미지를 훼손하는 부분이 아니"라며 "(제재)하려고만 하면 어렵진 않겠지만 할 수 없는 입장도 이해해주셔야 할 것"이라 말했다.

현재 낙서가 심한 식물 앞에는 '식물사랑'이라는 팻말이 꽂혀있다. 초기에는 '낙서금지'란 팻말을 사용했지만 표현이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순화시킨 표현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식물사랑'이라는 부드러운 단어 앞에 그리고 추억이라는 미명 아래 '상처'를 새기고 있다.

# 관광객도 지키고, 관광지도 지키는 법

중국은 자국 관광객의 권익을 보호하고, 중국 관광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관광진흥법인 '여유법(여행법)'을 개정했다.

지난해 10월 1일 개정된 여유법(여행법)에는 관광지 '낙서'와 관련한 법령이 존재한다.
여유법에 따르면 관광지 등에 낙서를 하거나 칠을 하는 행위, 국가보호 문물이나 유적지를 고의로 손상하는 사람에게 가벼운 사안일 경우 경고 및 200위안의 벌금에 처한다.

중대한 사안일 경우에는 200위안 이상 500위안 이하의 벌금에 처하며, 5~10일 구류에 처하는 등 강력히 처벌하고 있다.

특히 낙서에 못 이겨 곳곳이 훼손됐던 만리장성에는 프리 낙서를 위한 일명 '낙서존'을 설치했다.

도내에도 '낙서존'이 존재한다.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에 자리한 수월봉 기상대에는 방문객을 위한 '낙서판'이 있다.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한 녹음이 매력적인 사려니숲길 곳곳에도 방문객들을 위한 낙서판이 자리해 있다.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자연에서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최고의 배려인 셈이다.

조 씨에 따르면 아가베 같은 경우에는 잎이 자라면서 바닥으로 쳐지는 특징이 있어 바닥에 쳐진 잎을 쳐내야 한다. 이 때 생채기가 난 잎이 잘려나가며 다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다.

다른 식물들도 마찬가지이다. 끊임없이 생장하지만 관리를 위해 잘려나가고, 그 과정을 통해 상처를 지워낸다. 결국 생장을 통해 식물 스스로가 자신을 치유하고 있는 셈이다.

식물도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과학자들의 실험을 통해 증명됐다.
식물은 고착생활을 하기 때문에 주변 환경에 따른 영향을 크게 받는다. 특히 상처를 입을 경우 정상적인 에너지활동에 제약을 받아 생장에 어려움을 겪는다.

낙서를 하는 사람들은 식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본인이 하는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이 느끼지 못한다고 고통이, 고통이 아닌 것은 아니다. 식물은 '방명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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