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 ⓒ뉴스제주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선교하다 돌아가신 이태석 신부님의 2주기 기일이 돌아 왔다.

『울지마 톤즈』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저런 선교활동와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갘난했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의사로서의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라는 하느님의 성소에 음답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아프리카 오지, 남수단으로 들어가 그들과 같이 어울려 살면서 선교와 교육, 의료,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통사람은 아니구나 생각했고, 성인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고까지 느껴졌다.

나는 어려서부터 외구기인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는데 ‘저 분들이 고향의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고 낙후된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고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었다.

내가 1949년 신성여중 급사로 취직하게 되었을때 아일랜드 출신 손 신부님(더손), 라 신부님(토마스)과 만나게 되었다.

1948년까지는 서 신부님(스위니)도 함께 계셨다는데, 고향인 호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이 분들은 1933년도에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고 하니, 내가 태어기 일년 전에 오신 것이다. 나는 라 신부님에게서 세례를 받았지만, 손 신부님과 더 가까웠다, 그 분들은 제2차 세계대전당시 일본으로부터 스파이로 몰려 옥살이도 하셨다.

세월이 자나 발전한 한국을 다시 찾으신 그 분들과 옛날 이야기를 주고 받은 적이 었었다.

전기, 수도가 없었으니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가가 없었고 신작로(도로)가 없고, 자동차도 없었으니 교통이 매우 불편했다,

밭에는 거름한다고 시동(썩힌 똥거름)을 뿌려 똥냄새가 진동했고, 파리. 모기가 들끓어 위생상태가 극히 불량했다.

미신을 신봉하여 무당이 성행했지만 모든 것을 참고 극복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라 신부님이 목고 다니는 헌 지프차의 시동을 거느라고 본네트 앞쪽에서 스타진 돌리는데 젖 먹던 힘을 다 쏟았었다.

미국인 모 신부님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드리느라고 사제관을 자주 들락거렸다.

이어서 구 신부님, 원 신부님, 길 신부님, 은 신부님, 함 신부님, 도 신부님 현 대주교님등 골롬반회 소속 신부님들을 모실 수 있었다.

제주교구 평신도 사도회장이었을 때 원 신부님과 길 신부님을 모시고, 제주교구청 부지와 신성여중.고 이설부지를 물색할 때의 에피소드는 잊을 수 없다. 교구청 부지로 지금의 그랜드호텔 자리를, 신성여중, 고 후보지로는 지금의 연동 제원아파트 자리를 추천했더니, 현장을 둘러보던 두 분 신부님 모두 “현 스테파노(나의 세례명), 절간 다녀요? 절간터 찾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소나무만 우거진 숲 속에다 성당을 지으라니......” 하며 놀렸고, 다른 신자분들이 퍼뜨린 소문에 의하면 “현 회장이 서쪽(노형)사람이라, 신성여중.고도 서쪽으로 끌고 가려 하는 것 같다.”는 오해가 있어, 내 주장을 철회한 채 이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덮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제주 도시계획이 발표되면서 땅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자 두 신부님께서 나에게 “스테파노의 선경지명을 미처 몰랐었네.” 하고 후회하는 말씀을 하셨다.

원 신부님 서거 10주년 기일을 맞아 아일랜드로 건너가 기념미사를 봉헌한 우리는 유해를 제주로 모셔오려 했으나 그 곳 사정을 알고 나서는 그냥 돌아와야만 했다.

병원에 입원중인 길 신부님을 병문안하려 했으나, 골롬반회 측에서 만류하였다.

은 다니엘 신부님께서는 “평소의 길 신부님 모습으로만 추억하며 간직하게.” 하고 말씀하셨다. 치매와 노환으로 면회도 불가할 정도의 심가한 상황이라는 소식만을 접한 채 되돌아 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부음를 전해 들었다.

1984년, 한국 선교 200주년을 기념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직접 서울에 오셔서 103위 성인 시성식을 거행했다.

제주에서 선교하다 떠나셨던 신부님들이 이 기회에 한국에 잠시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골롬반회로 찾아가 이 분들은 서울의 신라호텔로 청하여 식사를 대접했다,

그 날 같은 시각,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주최하시는 연회(한구에서 선교활동하다 떠나셨지만 이번 행사를 위해 특별히 초청된 신부님들을 위한 만찬)가 있었지만, 내가 모시는 자리가 이무럽다시며 골롬반 신부님들 전원이 신라호텔로 오시는 바람에 나도 생각지 못한 거액의 저녁식사 비용을 지출했다.

하지만 모처럼만의 반가운 만남이었고, 모두가 너무 즐거워하셔서 나로서도 매우 뿌듯한 저녁시사였다.

한림읍 금악리 성 이시돌센터에 갈 때마다 임 신부님(메크린지)의 공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제주에 와서 제주도의 농민들이 지지리도 못 사는 것을 보고,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이시돌 목장 건설이었다. 돼지농장, 사료공장, 수직공장, 이시돌의원, 양로원, 수련원등 이 모두가 임 신부님이 제주도 농민들을 위해 만든 시설이었다.

임 신부님께서는 사제서품 60주년 기념을 매우 조용하게 지내셨는데, 제주에 처음 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며 당신의 노력으로 이룩한 발전 이라기 보다는 제주도민의 부지런한 정신과 노력이 이룩한 발전이라고 오히려 도민에게 공을 돌리셨다,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이셨다가 제주교구를 독립시키시면서 대주교의 신분이심에도 제주도로 내려오신 혀 대주교님을 생각하면 무한한 존경심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제주교구는 아직 정식 교구가 아닌 지목구였다.

겨우 교구로 독립하게 되었으니 초임 주교나 올 만하 자리에 대주교의 권위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진하여 내려 오셨고, 제주교구 발전의 밑거름이 되셨으며, 그리고 땅 황사평에 지금 묻혀 계시니, 자연히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이제 우리 l나라 선교사(신부님)들이 후진국으로 많이 떠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 나라가 언제 이렇게 발전했나 하는 놀라움을 그치 못한다.

그들도 그 나라에서 존경받는 성직자가 되어주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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