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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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9월, 나는 천주교 제주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장 자격으로 김옥희 수녀님이 저술하고 천주교 제주교구가 발간한 『제주도 신축년 교난사』라는 책에 축사를 썼다.

1886년 체결된 한.불조약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천주교 박해도 끝난 시기에 평화롭던 제주도에 1901년(신축년) 소위 ‘이재수 난’이라는 신축년 교난이 발생했다.

관덕정 마당에서 700여 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이 이재수 일당들에게 학살된 사건이다. 제주도민들에게는 천주교 신자들이 이재수 일당들에게 학살된 사건이다.

제주도민들에게는 천주교인들의 난폭한 행동을 이재수가 수습한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던 바, 이 책 발간을 계기로 제대로 인식되기를 기원했다.

1889년 제주성당이 설립되고 프랑스 신부가 부임해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나 유교가 뿌리 깊은 제주에서는 선교가 쉽지 않았다. 천주교 선교에 어려움이 있었던 주요 이유로는

1. 우림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는 양반들에게 천주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시지 않는 사이비 종교라 인식되었고,

2. 양반들 대부분이 첩을 두고 있었는데,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첩을 인정하지 않아 양반들 비위를 거슬렀다.

3, 한편 일반 서민들은 거의가 미신에 빠져 점쟁이와 무당 말을 믿고 살아가는데, 천주교에서는 이런 미신행위를 하면 죄가 되고 죽어서도 천당에 갈 수 없다고 가르쳤으니, 점쟁이와 무당들의 생업에 위협이 되었으므로 맹렬히 천주교를 비난하였다.

이런 이유로 가뜩이나 제주에서의 선교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시기에 마침 조정에서는 1900년부터 제주도에도 국세를 부과하도록 조세제도가 바뀌었다.

그때까지는(1899년) 제주도는 변방으로 취급되어 국세를 면제하였고, 대신 비방관(원님)들이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하여 자기 공을 다스렸고, 핑계에 초과징수하여 세금수탈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작폐가 없지 않았다.

이런 때에 목사와 동격인 봉세관을 중앙에서 파견하여 국세까지 징수하려 하였으니, 기득권 세력인 목사의 심기가 좋을 리 없었다.

그는 지방 유림과 양반 들에게 “내가 제주도민을 생각해서 세금도 적게 부과하는 선정을 베풀었는데, 이제 봉세관까지 내려 와서 도민의 고혈을 빨아가게 되었다.” 며 봉세관에게 협조하지 말도록 이간질을 시켯다.

그러니 제주목사와 동격인 봉세관이지만 지방관의 협조를 얻지 못하여 부하 세리조차 구하지 못한 채 세금징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때 제주에는 외무대신을 역임한 김윤식 등 15~6명이 유배 와 있었다.

그중에서도 중앙에서 이리 저리 간신배 노릇하다가 유배 온 C 씨 등 몇 명은 제주에 와서도 잔꾀를 짜내기 시작했다. 한·불조약이 맺어졌으므로 프랑스 신부와 친분을 유지해 두는 것이 훗날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이라 생각한 C 씨 등 일행은 서둘러 성당을 찾아가 위장세례를 받고 선교활동에 도움을 드리겠다고 프랑스 신부에게 아첨을 떨었다.

그들의 잔꾀란, 봉세관이 부하 세리를 구하지 못해 애먹고 있으니, 신부님이 추천한 신자들을 봉세관 부하 세리로 쓰도록 연결시킬 터이니, 신부님이 추진한 신자가 봉세관 부하로 취직되면 좋은 직장을 갖게 된다는 소문이 돌게 될것이고, 이런 소문이 떠돌게 되면 자연 신자수도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감언이설로 설득했다.

또한 그들은 봉세관에게 찾아가 신부님께 부탁하면 부하 세리를 쉽게 확보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신부님과 봉세관이 손을 잡게 한다

그 결과 전교에 어려움을 겪던 성당측에서는 갑자기 신자수가 늘어나 선교에 활기가 붙었고, 봉세관도 지방관의 협조없이도 부하 세리들을 확보할 수 있어 본격적으로 징세활동을 전개하게 되니 양쪽 모두에게 득이 되었다.

그러나 신부님 추천으로 봉세관 부하 세리가 된 사람들은 급조된 가짜신자들로서 천주교에 대한 신앙보다는 세리 역할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이들의 가혹한 세금 징수 활동이 점점 민원으로 쌓여 전체 천주교 신자들의 작폐로 오인되는 나쁜 인식이 퍼지고 말았다.

한편 대정원님 C 씨는 사설 상무사를 차려 돈 맛을 보더니 일본 잠수기선 업자와도 손잡고 어업협정을 맺었다.

일본 배도 제주바다에서 고기잡고, 우리 나라 배도 일본 바다에서 고기잡으면 서로 좋지 않으냐고 떠들고 다녔다.

이 소식을 들은 신부는 일본 독닥배(기계선)는 우리 나라까지 와서 고기잡을 수 있겠지만, 제주의 노 젓는 쪽배로는 어떻게 일본바다까지 갈 수나 있겠느냐며, 거짓 말이니 도민을 속지 말라고 설교하여 원님과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만다.

그런가 하면 한·불조약 당시 조정에서는 불란서 신부들에게 『여아대』라는 패찰을 지급하였다.

즉, 임금인 나를 대하듯 불란서 신부들을 존경하라는 뜻이다. 이 패찰을 지니게 된 선교사들은 걸핏하면 패찰을 내 보이며 지나치게 내정에 간섭을 했고, 신축년 교안 때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이 겹치고 쌓여 마침내 폭발한 것이 소위 ‘이재수의 난’이었는데 이재수 일당들이 제주성으로 쳐들어 올 때에는 이 사건을 수습해야 할 병권의 책임이있는 제주목사는 수뢰사건으로 파직되어 공석이었고, 제주군수 김 아무개는 성 밖 화북으로 슬그머니 피하여 술판을 벌이고 놀면서 제주성은 성당 신자들이 알아서 지키든지 말든지 하라는 식으로 외면하고 만다. 그리고 성내에 살던 무속인들은 오히려 기회라고 여려 성문을 열어 주고, 천주교 신자들을 더 많이 색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 인명피해가 크게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이제수 난의 원인을 간단하게 한 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여전히 남아있다. 이 사건으로 떼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가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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