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탄 자살 사망자 2004년 50명→2013년 1825명 ‘30배’ 급증
용이한 접근성‧모방심리 작용 “근본 대책 모색해야”

▲ 서민들의 언 몸을 녹이고 고기를 구워먹기 위해 사용했던 번개탄이 자살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번개탄으로 인한 자살 사망자는 2004년 50명에서 2013년 1825명으로 30배 이상 늘어났다.ⓒ뉴스제주

10일 오후 8시 7분. 제주시 연동의 한 마트에서 번개탄을 찾자 직원이 손가락으로 왼쪽 모퉁이를 가리킨다. 청소용품이 있는 코너로 돌아가니 동그란 모양의 번개탄 2종류가 눈에 띈다. 한 개를 집어 계산대로 향하자 “600원이요”라는 계산대 직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날 1시간가량 도보로 연동 소재 마트 10곳을 둘러본 결과 편의점을 제외한 7곳에서 번개탄을 판매했다. 번개탄을 한 개 구입하는데 소요되는 평균 시간이 약 8분인 셈이다.

번개탄 자살 9년새 30배 

서민들의 언 몸을 녹이고 고기를 구워먹기 위해 사용했던 번개탄이 자살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번개탄으로 인한 자살 사망자는 2004년 50명에서 2013년 1825명으로 30배 이상 늘어났다.

제주에서도 번개탄을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빈번해졌다.

지난 6일 제주시 화북2동에서 친한 형동생 관계로 지내던 남성 2명이 번개탄을 피운 차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달 31일에는 20~30대 남성 4명이 협재해변 야영장에서, 12일에는 서귀포시에서 30대 교회 목사가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국 자살률도 2012년을 기점으로 떨어지고 있지만 제주도는 여전히 상승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1년 176건이던 자살 건수는 2012년 181건, 2013년 192건으로 늘었다. 이는 인구 10만 명당 32.9명(평균 28.5명)으로 전국 17개 시‧도 중 4번째로 높은 수치다.

▲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번개탄으로 인한 자살 사망자는 2004년 50명에서 2013년 1825명으로 30배 이상 늘어났다. 제주지역 자살 건수는 2011년 176건, 2012년 181건, 2013년 192건으로 늘었다. ⓒ뉴스제주

상황이 이렇지만 제주도는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태다.

제주시정신건강증진센터 고영숙 팀장은 “생애주기별 자살교육과 상담 등 자살예방 서비스는 제공하지만 번개탄 등 자살 수단에 따른 개입방법을 논의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제주광역정신증진센터 역시 번개탄 자살을 줄이는 대책은 전무하다.

왜 번개탄인가

2008년 한 유명 연예인이 번개탄을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가 번개탄을 구입한 상점 주인의 인터뷰가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후 모방심리에 따른 번개탄 자살이 크게 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7년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사망자 수는 총 87명으로 전체 자살의 0.7%에 불과했으나 2013년 12. 6%를 차지했다.

편리한 접근성도 원인으로 꼽힌다. 권순용 제주국제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번개탄은 일상생활용품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구입 혹은 획득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에 자살의 수단으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권 교수는 “자살 방법으로 번개탄을 사용하는 경우 술 혹은 수면보조제를 병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다른 방법에 비해 고통을 느끼지 않거나, 고통의 수준이 현저히 감소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탈출구는?

1998년 11월 홍콩의 한 여성 화학자가 바비큐용 목탄을 피워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1998년 총 784건의 자살 중 16건(2%)에 불과했던 번개탄 자살은 2002년 총 1109건 중 276건(24.9%)으로 증가해 홍콩에서 두 번째로 흔한 자살 방법이 됐다.

▲ 동네 상점마다 박스에 담아 판매하고 있는 번개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뉴스제주

문제가 심화되자 홍콩에서는 번개탄에 대한 물리적 접근성을 낮추는 연구가 진행됐다.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번개탄을 없애고, 직원에게 문의해 10분간 기다린 뒤 전화번호를 남기고 구입하도록 했다. 물리적 접근성을 제한한 결과 해당 지역에서 번개탄을 이용한 자살이 53.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산화탄소 중독의 부작용을 알려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홍진표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등은 논문 ‘번개탄을 이용한 자살에 대한 전반적 고찰과 예방 대책’을 통해 “일산화탄소 중독의 후유증으로 보행 장애, 무언증, 실행증, 파킨슨증, 기저핵 병변, 해마 위축 등이 있다”며 “언론은 자살기도자 중 생존자가 겪는 신경학적 후유증에 대해 알릴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이달 초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신형 번개탄을 개발하겠다는 방침을 내놓기도 했다. 번개탄을 피울 때 발생하는 일산화탄소를 줄여 사망에 이르는 시간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충고한다.

권순용 교수는 “사실상 번개탄을 제도적으로, 법적으로 근절 혹은 규제할 방법은 없다”며 “일산화탄소 절감 문제는 공학과 해당 산업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연구·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회안전망에 대한 관심을 재고하는 것”이라고 제언했다.

권 교수는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병들어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며 “지난 20년간 제주도는 어느 지역보다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공동사회의 요소가 잔존하던 제주도는 산업과 문화의 변화 등에 의해 적응하기 벅찰 정도의 속도로 이익사회로 이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권 교수는 “자살의 이유는 재정적, 인간관계적 문제 등 다양하지만 이를 시도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암시한다”며 “이들의 목소리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인다면 가파르게 증가하는 자살률의 고삐를 틀어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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