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잡하기 그지없던 미로 같은 공간을 지나 위로 올라오니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입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듬성듬성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아래보단 평온했지만 내가 주차를 하는 순간에도 쉬지 않고 차량들이 올라왔다.

지난 11일 이른 저녁 제주시 연동 272-31번지. '신제주공영주차장'은 듣던 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이곳엔 두 달 전 커다란 현수막 두 개가 내걸렸다. 무질서한 주차행위로 2015년 5월1일부터 휴일 무료운영을 유료로 전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날 1층은 이미 만차였다. 주차선이 없는데도 '보이지 않는 선'을 만들어가며 기가 막히게 주차를 해놓은 차들이 눈에 띄었다. 장애인 전용 주차 공간마저 꽉꽉 들어찼고, 전기차 충전기가 놓여있는 '전기차 지정석'도 이미 자리를 내준지 오래였다. 그 날은 5월1일이 아니었다.

신제주공영주차장은 심각한 주차난 해소를 위해 2013년 8월 사업비 25억원을 투자해 복층화 사업을 시행했다. 지난해 2월 완공된 신제주공영주차장은 인근이 상권 지역인 것을 고려, 지역 상인과 이용객들의 편의를 위해 이용시간이 많은 오후 1시부터 11시까지 10시간만 요금을 징수 받고, 이외의 시간은 무료로 개방했다.

이 '편의'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를 악용해 며칠씩 장기 주차하는 차량이 늘었다. 장애인 주차구역에 일반 차량을 세워 단속도 많이 했다. 주말엔 이용차량이 많아 금방 만차가 됐지만 그에 반해 주차회전율이 낮아 필요한 사람들이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제주시는 결국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휴일 유료화'를 선택했다.

"내가 조금 더 편하게…" 당연한 것을 등한시했던 시민의식 부재가 낳은 결과다.
내가 조금 오래 주차할 것이면 당연히 입구에서 가장 먼 곳에 차를 세우는 것이 맞다. 장애인들을 위한, 전기차를 위한 지정석은 비워두는 것이 상식이다. 주차자리가 꽉 찼으면 돌아 나가는 것이 정답이다. 그곳에 '배려'는 없었다. 오로지 나의 '편의'뿐이었다. 우리는 주어진 권리도 제대로 누리지 못해 잃는 신세가 됐다.

각 국가와 개인마다 선진국을 판단하는 척도는 다르다. 대표적으로 UN은 선진국의 척도로 1인당 GDP, 건강 기대 수명, 사회적 지원·기부, 인생을 선택할 자유, 부패에서의 자유, 관용성을 꼽는다.

물론 이외에도 많은 것이 선진국의 척도가 되겠지만 이젠 '경제력'만으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미국 비영리단체인 사회발전조사기구(Social Progress Imperative)가 발표한 2015 사회발전지수(SPI)에 따르면 한국은 133개 국가 중 29번째 '살기 좋은 나라'에 선정됐다. 점수는 100점 만점에 77.70점.

'사회발전지수'는 경제적 요소를 제외한 기본 인간 욕구, 웰빙 기반, 기회 등 3개 부분의 점수를 종합해 국가의 발전 정도를 책정한다.

기본 인간 욕구는 영양 및 기본 의료 지원, 불과 위생, 개인 안전, 주거 등 4개의 세부항목으로, 웰빙 기반은 기초 지식, 정보통신 접근성, 건강, 생태계 지속 가능성으로 구분된다. 기회는 개인 권리, 고등교육 접근성, 개인의 자유와 선택, 관용과 통합으로 나뉜다.

한국은 영양 및 기본 의료 지원에서 가장 높은 점수인 98.81점을 받았다. 이어 기초지식, 정보통신 접근성, 고등교육 접근성이 높은 축에 속했다. 반면, 생태계 지속가능성에서 가장 낮은 점수인 45.34점을 받았고, 관용과 통합, 개인의 자유와 선택 등이 낮은 축에 속했다.

채우는 것에 급급하다보니 버리지 못하고, 지식 과잉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는 우리의 단면을 보여주는 결과다. 바야흐로 '개인의 시대'가 찾아왔다.

제주시는 궁여지책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걱정이 앞선다. 무료에서 유료로 전환되면서 인근 불법 주·정차가 늘 것이라는 고민에서다. 시는 자치경찰단과 협력해 불법 주정차 단속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고민은 근본이 바뀌지 않는 한 계속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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