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느낀대로

▲ ⓒ뉴스제주
 

요즘 지방지 광고란에는 축하광고로 도배하는 수준이다. 당선 축하, 취임 축하, 수후 축하, 사법고시, 회계사 합격 축하, 심지어 리장 취임. 초등학교 동창 회장 당선 축 등 형형색색이다.
그럿도 출신 리, 출신 교, 친목회, 종친회 삼촌, 고모, 이모, 형제 별로 광고를 내다보니 한 사람에 대한 내용으로 한 면이 다 차는 경우도 보았다,
아마도 축하 광고로 깜짝 놀라고 창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내가 원조가 될 것 같다.
내가 기업은행 지점장 대리에서 차장으로 승진하여 여기저기서 축하의 인사를 받고 있던 어느날, 제주신문 하단 천면에 차장 승진 축하 광고가 게재되었다.
지점장 승진도 아니고 겨우 차장 승진만한 일로 신문 하단 전면 광고였으미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고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시민들이 나를 보기를 “차장만씩한 거 갖고 요란떨고 있네.” 하고 조롱할 것 같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광고를 부탁한 분은 칠성통 입구에서 아주반점을 운영하고 있는 중국인 범서진씨였다.
아주반점으로 전화 걸어 범 사장에게 쓸데없는 짓을 하여 사람을 창피하게 만드느냐고 항의했더니 “당신이 승진하니 내가 기뻐서 축하하는 것이오. 앞으로도 두 번 더 나갈 예정입니다.”하고 껄껄 웃었다.
제주신문사에 달려가 앞으로 두 번 더 광고나가는 것을 중단해 달라고 했더니, 이미 광고료를 모두 받아 버렸으니 의뢰인이 취소요청하지 않는다면 광고 중단할 수가 없다고 거절당했다.
아주반점으로 달려가 범 사장에게 광고중단시키라고 애걸했지만 웃기만 하면서 들어주지 않아 하는 수 없이 3회 모두 광고가 나가고 말았다. 정말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범 사장과 나는 6.25전쟁으로 인연을 맺게 된 친구였다. 내가 6.25전쟁 당시 군대에서 부상으로 명예제대하고 돌아와 제주 미국공보원에 근무할 때, 매일 미국공보원 전시실에 와서 구경하는 미남 청년이 있었다.
인사를 나누었더니 중국인 범 씨였다. 중국에서는 매우 잘 살았던 집안인데 중국이 공산화될 한국으로 피난왔고, 또 6.25 전쟁으로 제주에까지 피난와사 아직은 음식점도 차리지 못한 채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로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져서 흉허물없이 사귀게 되었는데, 그는 아주반점이라는 중국음식점을 차리게 되었다.
그 때 마침 제주비행장에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생겨서 그는 중국어 통역으로 미군부대를 자주 방문하게 되었고, 나는 제주미국공보원 직원으로 영상상영하러 중공군 포로수용소를 드나들게 되어 더욱 가까워졌다.
그런데 내가 깜짝 놀란 것은 나이가 나보다 한 두 살밖에 더 먹지 않았는데도 그는 벌써 5개 국어(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 독일어)에 능통했다.
세월이 흘러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하게 되자 그는 나의 충실한 예금고객이 되었고, 나도 될 수 있는 한 그 집에서 많이 팔아주곤 했다. 심지어 서울이나 부산 등지에 나갔을 때 피치못하게 중요한 손님을 대접할 일이 생기면 그 곳을 큰 중국음식으로 손님을 모시고 가 대접하면서 제주도 아주반점 범 사장의 이름을 대고 외상음식을 먹곤 했다.
그 때는 신용카드가 없었고,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닐 수도 없는 때였는데 “제주도 아주반점 범 사장에게 전화해 보고 외상을 주시오.” 하면 흐쾌히 외상으로 음식을 내주어 손님대접을 무사히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거의 한 가족처럼 지내던 그는 내가 차장으로 승진했다니 너무 기뻐서 축하광고를 내어준 것인데 그때까지는 이런 식으로 축하광고를 내준 것을 본 적이 없엇기 때문에 더욱 놀라고 창피해했던 것이다.
그는 아이들을 미국으로 유학시키더니 자식들이 성장하자 제주의 집은 빌려 주고 그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해마다 연하장을 보내 오더니만 급기야 부음을 듣고 말았다.
제주를 제 2의 고향으로 여기고 일년에 한 번씩 들렸을 때 만나보면 건강해 보였는데, 나이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