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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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9월 24일, 우리는 오현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식을 제주KAL호텔에서 가졌다. 우리를 직접 가르친 은사님과 모교 교장 교감 및 총동창회 임원과 고문님들을 함께 초대했고, 국내외에 흩어죠 살고 있던 동문들이 부부동반으로 몰려와 조럽 50주년 행사를 거행했다.

1955년 모교를 졸업한 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동문들이 이 날 오랜만에 만나 재학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는 정겨운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학교를 떠난 후 50년의 세월을 보냈다다니.....홍안이었던 우리의 모습이 어느덧 백발에 주름진 얼굴로 변한 노인이 되었으니 참석한 동문 모두가 감개무량한 모습이었다.
1953년은 6.25전쟁이 한창이었고 제주도에는 피란민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모슬포에는 육군 제 1훈련소가 있어 육지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시기였다.
우리는 1953년 3월에 오현단에 있는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오현고등학교는 당시 문교부로부터 고등학교 인가를 받은지 1년밖에 안되었고, 구내에 피란온 학생들을 수용하는 피란 중. 고등학교가 병설하고 있어 천만교실이 즐비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학교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흙바닥 교실, 천막 교실이 뒤범벅이었다.
특히 나는 주간부 학생이 아니라 야간부 학생이었다. 전기서설이 안되어 등피(램프)불 아래서 수업을 받으려니 칠판에 쓰인 글씨가 안 보여 애를 먹었다. 날씨좋은 날에는 오현단 늙은 폭낭(팽나무)그늘에 모여 앉아 수업을 받았고, 운동장은 학도호국단 훈련으로 언제나 먼지가 뽀얗게 날렸다. 그러나 피란내려와 있던 유능한 선생님들이 계셨으므로 학교 시설과 환경은 좋지 않았음에도, 학생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이런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오현고등학교를 1955년 3월 졸업과 동시에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헤어져 50년 세월을 보낸 것이다. 우리는 그 세월동안 우리 나라의 여러분야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여 우리 나라 발전의 밑거름을 이루었고 정년을 맞이하여 은회했다.
이미 오현고 3회 동회장을 맡으라고 압력이 가해졌다. 말하자면 내가 2005년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를 맡아 추진할 적임자라는 의견이었다. 동문들의 성화에 못이겨 또 다시 동창회장직을 맡고, 1년 동안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문제는 경비조달이었다. 결국은 동문들 주머니를 털어서 50주년 행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문들에게 제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돈 이야기이다. 큰 행사를 앞두고 자진하여 희사해 주는 동문도 있는가 하면, 충분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동문중에도 몇 번씩 부탁해서야 겨우 개인 부담금(5만원)을 내는 이도 있었다.
1인당 부담금 5만원으로는 기념품(손목시계)과 KAL 호텔 부부회식비, 사슴 농장 회식비, 도 일주 경비 등 본인에게만 소요되는 1인당 경비조차도 충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니만 그 이상 부담하라고 하면, 모임을 가지는 취지 자체가 반감될 것 같아 그대로 진행했다. 다행히 몇 몇 동문들이 크게 손을 퍼 주어, 50주년 기념행사를 알차고 멋지게 추진할 수 있어서 두고 두고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나는 그 날 기념사에서 “이미 고인이 된 동문, 생존해 있지만 거동을 하지 못해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한 동문들을 생각하면서,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동문들 얼굴을 다시 한 번 졸 보자. 10년 뒤, 2015년 졸업 60주년 행ㅇ사에 참석할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보자. 오늘 에어지면 다시는 이 세상에서는 못 만날지도 모르니 오늘을 즐겁게 후회없이 보내자.” 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50주년 행사 때 활발하게 노래하며 춤추던 동문들중에 이미 여러 멸이 지금은 세상을 뜨고 없다.
졸업 60주년(2015년)도 이제 멀지 않았는데, 그 때 모임에 안 나오젠?(안 나오려는?) 아무리 급해도 세상 떠나는 거 참자!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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