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럽 ]보고 듣고 느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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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8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나주성당 주임신부님과 평화방송 PD 등이 나를 찾아왔다. 찾아온 요지는 현 대주교님(미국 이름 : 헤롤드 헨리(Harold Henry))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현 대주교님께서 걸어오신 발자취를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그 분이 한국에 들어오셔서 처음 사목을 시작한 나주성당에는 현 대주교님 기념관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 대주교님의 제주에서의 선교활동 내용 중 평신도 대표였던 나의 기억에 대하여 말해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현 대주교님께서 제주에 남기신 업적은 글이나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숭고한 것은 대주교의 신부이셨음에도 그 당시 정식 교구도 되지 못했던 제주지목구(교구 승인격 이전 단계)로 지원하여 내려 오신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낸다.」는 서러운 속담이 가리키는 곳, 제주로 그 분은 스스로 거침없이 걸어 오셨다. 게다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서상으로는 승진하거나 높은 관직에 오르면, 더 좋은 고, 더 넓은 곳, 더 편한 곳으로 가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러나 그 분은 낮은 곳으로 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이 조그마한 제주도에 자신을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이 기회에 현 대주교님의 일생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현 대주교님은 1909년 11월 11일 ,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출생하였고, 1932년 12월 21일 성 골롬반 외상선교회 대학을 졸업한 뒤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수품뒤 중국 선교사로 임명받아 중국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한국으로 임지가 변경되어 1933년 10월 한국땅을 밟게 된다.
이때 제주성당의 손(도슨 P.Dawson 파트리치오) 신부님과 서귀포성당의 라(라이언 T.D Ryan) 신부님도 동창생으로서 동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934년부터 전남 노안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나주성당 주임신부가 되었으니, 첫 본딩이 나주성당이 되고 있다. 1941년 대동아전쟁(제2차 세계대전)기간동안 8개월여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고, 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그 후 군종신부와 골롬반대학 교수로 활동하다가 종전후인 1947년 10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광주교구장(지목구장) 대리로 활동하셨다. 1950년 7월에는 제5대 광주교구장 서리로 임명됨으로써 자연스레 제주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당시 제주교회는 광주교구 소속이었다.) 1954년 10월 정식으로 광주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957년 5월 11일 , 미국 보스톤에서 주교로 서품받았다. 1962년 3월 25일 한국 교계제도 설정으로 대주교로 송품하여 광주대교구장이 되신 것이다.
제주지목구는 1971년 6월 28일자로 설정되었고, 1971년 9월 6일, 현 대주교님은 제주시민회관에서 교황대사와 김수환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구장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현 대주교님은 제주교구의 튼튼한 초석을 깔아놓기 위하여 성당증설과 신성여자 중, 고등학교의 현대화, 이시돌 개발사업의 활성화, 제주꾸르실료 사무국설립, 지역사회와의 융화 등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셨다.
1976년 3월 1일 , 나는 제주시민회관에서 거행되는 삼일절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기념식이 한창 진행중일 때, 내 손에 메모 한 장이 급히 전달되었다. 메모는 『현 대주교님 급서, 빨리 주교관으로 오시오.』라고 씌여 있었다. 급히 주교관으로 달려가 보니, 현 대주교님은 주교관 소성당에서 미사를 끝내고 기도중에 심장마비로 쓰러져 선종하셨다.
현 대주교님의 영결식은 전국에서 많은 고위성직자들이 제주로 내려오신 가운데 3월 4일, 제주 중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겨의 주례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황사평 교회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현 대주교님은 대주교라는 직위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제주지목구장을 자칭하여 내려오셔서 제주교구의 반석을 깔아주신 훌륭힌 성직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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