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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대한항공 매표소에서 서울행 비행기표를 사고 있었다. 그 동안 해외 여행하며 적립한 마일리지가 많이 있어서 한달에 한 번씩 서울모임에 올라가는 비행기를 공짜로 탔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일리지도 모두 소모되어 돈을 내고 표를 사기 시작한 지 일년쯤 되었다. 항공료를 계산하려고 신용카드를 꺼내다가 국가유공자증이 함께 묻어 나왓다. 카운터의 아가씨는 오래전부터 나를 잘알던 단공인지라 “그 카드는 뭡니까?” 하고 물으며 나를 쳐다봤다.
“응, 국가유공자증이야. 내가 6.25 때 전쟁터에 참전했다가 부상당한 상이군인이거든....” 하고 자랑했다.
“아휴~~ 국가유공자증이 있으면 30% 할인해 드리고 있는데, 무사(왜)지금까지 그냥 돈 다 내고 다니셨수광?(다니셨습니까?) 그 카드 이리 줍서.(주세요.)” 하고 힐난하듯 쳐다보았다.
나는 여태까지 그런 혜택이 있는 줄 모르고 꼬박꼬박 전액 지급하고 비행기를 타고 다녔으니 나 자신이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알고 보니 동사무소에서 발급하는 각종 민원서류 수수료도 국가유공자는 면제하고 하지 않은가. 그전부터도 친구들이나 집사람으로부터『미련한 사람』이라는 놀림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6.25 때 참전하여 북한 인민군의 총알세례를 받고 명예제대한 상이군인이다보니, 그 덕으로 대학생 서울 혜화동에 있는 상인군인 대학생 정양원에서 먹고 살면서 교통비도 무료, 국장도 무료 등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농업은행에 합격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도 하게 되었다. 같이 생활하던 서울의대생 기형구 씨도 졸업후 인턴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일부 상이군인들이 민원의 대상이 되고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곤 했다. 상인군인에 대한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곳곳에 돌아다니며 물건을 강매하는 등 행패를 부리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폐단을 익히 알고 있었던 우리 둘은 한 가지 의견일치를 보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나라의 혜택을 받고 정양원 생활을 했지만, 이제 취직도 외었고 생활기반을 얻었으니 보건사회부에 가서 상이군인 자격을 사양하겠다고 말하자. 요즘 상이군인에 대한 인식도 별로 좋지 않은데, 이 기회에 그만 두기로 하자.
둘은 보건사회부 원호국장을 찾아가 우리의 뜻을 밝혔더니, 원국장은 크게 반가워하면서 “국가의 도움을 이제 안 받고도 자립하게 된 자네들을 축하하네!” 하며 격리해 주었다.
우리 둘은 상인군인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반납하고 의기양양하게 보건사회부 청사를 나왔다. 1960년 5월 이었다
세월이 흘러 직장에서도 정년퇴직하고 6.25 참전 용사들 모임에 다니게 되면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어 깜짝 놀랐다. 상이군인 연금을 못 받게 된 것도 억울했고, 상이군인 자녀들의 학비도 면제대상이었고, 원대상자의 자녀들은 취직도 쉽다는 혜택이 있었는데, 나는 그 모든 혜택을 포기해 버리고 만 것임을 깨달았다.
집사람은 우리 아이들 5남매 학자금 혜택이년, 그게 도대체 얼마냐고 억울해 했고, 나도 상인군인 연금을 못 받으니 대폿값이 모자라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대학생 때 국가의 도움을 받았고, 좋은 직장을 얻었고, 평생동안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니, 이것만 해도 하나님의 은총이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이래도 내가 정말 미련한 사라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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