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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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초기, 우리 아버지는 하루 종일 낮 동안에 힘들게 밭일을 하고 집으로 오신 후 저녁을 드시고 나면, 듬직한 몽둥이를 둘러메고 바로 집을 나서셨다. 제주도 유림의 거두이며 제주중학교 설립자 겸 초대교장이시며 집안 어른이신 현경호 씨의 집을 호위하기 위해 고향 친척들이 순번을 짜서 나선 것이다.
제주도에 내려온 서북 청년들은 자기들 비위에 거슬리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테러를 하므로, 집안 어른인 현경호 씨도 그 위험 속에 있어 그 분을 지켜 드리기 위해 모두 합심한 것이다. 한동안은 노형리에서 성내(시내)까지 10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밤길을 왕래하시더니 “이젠 더 이상 안 가도 되염직 하다. 헌병대장이 그 집 바깥채로 이사 왔으니 오히려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은 고생스럽게 다니지 말라 하시드라.”
헌병대장이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모두가 안도하여 마음을 푹 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헌병대장이 육지부로 출장간 사이에 서북청년들은 현경호 씨와 그의 큰 아들, 그리고 제주도청의 K 국장 등 여러 명을 끌어다가 막은내 골짜기에서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 죽여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헌병대장이 이사 온 것에 방심하고 있다가 그만 당하고 만 것이다.
그 와중에 현경호 씨의 작은 아들 역시 행방불명되어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들리는 소문으로는 작은 아들은 일본으로 밀항하여 목숨을 부지하였고, 그 후 현경호 씨의 부인도 작은 아들을 따라 일본으로 밀항하여 아들과 지내다가 노환으로 그 곳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내가 기업은행 제주지점장 시절 일본 산업사찰을 가게 되었다. 기회가 되면 꼭 그를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나는 그와의 접촉에 앞서 괜한 불온한 억측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관계기관에 사전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쪽에서는 선선히 그를 만나도 좋다고 허가해 주었고, 덧붙여 “그를 꼭 만나시고, 우리 쪽으로 돌아서도록 힘쓰세요.” 라고 오히려 적극적인 권유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본에 도착한 나는 전화로 그에게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는 나보다 나이는 위였지만 내가 아저씨(삼촌)뻘이 되었으므로 매우 깍듯이 예의를 갖추면서도 한마디로 거절하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애석하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2년 후 또 다시 일본에 갈 기화기 있었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먼 만나기를 청했지만 여전히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큰 맘을 먹고, 그럼 전화로라도 내 뜻을 말할 터이니, 끊지 말고 들어보기라도 하라고 말하였다.
“당신의 입장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는 당신 몫의 재산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고, 현재 아무도 관리해 줄 사람이 없어 내팽겨 치다시피 되었는데 그냥 그대로 던져버릴 작정이십니까? 만약 귀국을 하신다면 신변안전과 무사히 일본으로 귀환을 내가 책임질 터이니 제발 한 번만 고향에 다녀가도록 하십시오. 당신을 조총련계 동포 모국방문단 일행으로 등록해 둘 것이고, 일본 민단에 있는 내 친구 아무개에게 부탁해 놨으니 필요한 사항은 그를 만나 의논하세요.”
장황한 나의 부탁에도 그는 간단히 알겠다는 대답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몇 달 후 정보기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조총련계 동포 모국방문단에 끼어 그가 제주도에 오게 되었으니, 비행장까지 마중을 하고 제주에서 지내는데 불편함이 없게 잘 모셔달라는 부탁도 했다. 나는 온 일가친척들에게 연락을 하고, 모두 모시고 비행장에 나가 그를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는 옛날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의 옛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떠날 때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고향집에 걸려있는 아버지 영정사진 앞에서 엎드려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흐리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날 저녁 나는 온 친척들을 탑동 횟집으로 모시고 가서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대접 하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정식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내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 아무리 친족이라 하여도 믿을 수가 없어서 일부러 냉정하게 대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왔다고 하지만, 자신을 붙잡으로 왔거나 죽이러 오지는 않았을까 하는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툭 터놓고 이야기 꽃이 무르익자 나는 물어 보았다.
“그런데 도대체 그 난리통에 어떻게 일본으로 밀항해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말씀 해 주시지요.”
그는 이제 이렇게 평화로운 고향을 보니 꿈만 같다면서 이야기를 들러주었다.
서북청년들이 아버지와 형님을 연행해 갈 때, 자신은 외출하여 집에 없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와 형님이 끌려갔고, 자신 또한 찾고 있음을 알고 고모님 집으로 숨어들었다. 고모님은 “여기를 안전한 곳으로 생각해서 숨어 들었느냐? 너를 찾는 놈들이 당연히 고모집부터 수색하러 올 터인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더냐?” 하며 부리나케 끌고 나가 닥끄내(용담3동)로 가더니 고모님이 아는 집이라는 곳 외양간에 숨겨 주었다.
며칠이 지나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 지기만 했다. 고모는 그 동네 독닥선(어선)주인에게 배값을 두 배로 쳐 주고 배를 샀다. 그리고 는 배를 운행하는 요령을 간다히 배우게 하더니, 밤중에 자기 혼자 출항하도록 했고 날이 새면 선주는 파출소에 가서 배를 도둑맞았다고 신고하기로 약속하였다. 신고할 때 쯤이면 독닥선을 현해탄을 넘었을 시간 일테고, 무사히 일본 규슈에 상륙하여 옛날 연고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고모가 계획을 모두 짰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밀항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우리 모두는 너무나도 용감하고 기발한 고모님의 계략에 감탄 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숨걸고 배를 내어준 선주도 무사했고, 어린 조카의 일생도 구할 수 있었던 그야말로 죽음의 탈출이었다.
고향방문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조총련에서 탈회하여 민단으로 전항 했고, 마음 놓고 고향을 다녀가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리고 몰락한 자기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남들에게 빼앗길 qJSG 그의 재산도 모두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와 형님도 안심하고 영면할 것을 생각하니, 지나간 세월이 모두 꿈만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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