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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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제주도 모슬포에는 육군 제1훈련소가 생겼다. 모슬포 일대에서는 훈련병들의 구보로 인하여 바람부는 날에는 흩날리는 흙먼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제주도의 거친 바람과 군대에서의 힘든 훈련탓에, 육지에서 들어온 훈련병들은 모슬포를 『못살포』라고 부르곤 했다.
농업은행 행원 B는 군에 입대하라는 소집영장을 받을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들이대며 군 입대를 미루어 왔다. 하도 여러 번 입대를 미루다 보니, 경제적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드디어 더 이상 내세울 핑계도 없어지고 해서 B는 체념하고
“이번은 정말로 입대하러 감수다.(갑니다.)”
하고 직장에서 차려주는 송별회식도 받아 먹고 떠났다. 몇 주일 후, 머리도 빡빡 깎고 얼굴도 검붉게 탄 모양새로 직당 사무실에 나타난 그는
“또 다시 돌아와수다.(돌아왔습니다.)”
하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이게 몇 번째 귀환이냐? 정말로 군대 안 가게 된 게 맞냐?”
고 묻자, B는
“나도 모르쿠다. 돌아가렌 허나 나와십주.(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가라고 하니까 나온 것 뿐입니다.)”
하고 아주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몇 주간의 신병훈련이 끝나고, 육지 전선으로 떠난다고 안덕면 사계리 백사장에 집결해 승선을 기다리던 신병들은 피곤에 겨워 꾸벅꾸벅 조는 사람, 옆사람과 잡담하는 등 매우 소란스러웠다. 그러는 가운데 헌병 지프타가 달려 오더니
“B 이등벼, 나와!”
하고 헌병이 여러 번 큰 소리를 질러 찾았다.
B는 잘못한 일도 없는데 헌병이 찾는 것을 보고, 속으로 내심 집안 어른들이 또 손을 썼구나 하고 기쁜 생각에 얼른 일어나 헌병앞으로 나아갔다. 헌병은
“차 타! 임마!”
하고 B를 차에 태우더니 쌩쌩~ 잽싸게 제주시를 향하여 달렷다. 제주시 중심지인 관덕정 마당까지 30분 만에 도착한 헌병 지프차는 급정거하더니
“내려! 집에 가! 임마!”
하고 B를 떨궈 주고는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 버렸다. 신병주제에 헌병에게 무슨 연유인지 물어볼 형편이 아닌지라 아무 말도 않고 시키는 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막상 집에 들어서자, 어른들은 되려 놀래며
“어떻게 된 영문이냐?”
하고 물었고, B는 오히려
“집에서 또 손 쓴 거 아니우꽈?(아닙니까?)”
하고 놀랬다. 이번만은 군대가야 할 것 같다고 당사자가 체념하길래, 집아 어른들도 이번은 아무 손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B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 동안 여러 차례 연기신청하느라 물심양면으로 공을 들여 놨더니 그 약발이 이번에도 효력을 보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다음 날은 평소처럼 사무실에 근무하러 출근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B와 종씨 집안에는 비슷한 연배의 이들을 둔 또 다른 아버지가 아들을 군대에서 빼내기 위해 헌병대장에게 단단히 공을 들여 놓았다.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무 소식도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또다른 B의 아버지가 헌병대장에게 찾아가 어찌된 일이냐고 따져 물었더니
“훈련끝나고 전선으로 출발하는 부두에서 빼내, 관덕정 마당에다 실어다 풀어줬으니 아마도 겁나서 지금쯤 어디 숨어 있는 모양입니다.”
하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여전히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는 또 다시 헌병대에 가서 아들을 싣고 왔다는 헌병에게 직접 자초지종을 물었다. 신병들 모인 곳에서 ‘B 이등병 나와라.’ 하고 소리쳤다니 한 사람이 나오길래, 분명 관덕정까지 싣고 와서 풀어줬다고 말했다. 그런데 B 이등병이라도 성만 불렀지, 이름까지 제대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B씨는 성씨가 희귀한 성이라서 그 신병들 속에 B씨가 두 명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한 헌병은 무조건 ‘B 이등병 나와! 하고 소리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목적했던 B 이등병은 원래 귀가 좀 먹어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알아듣지 못했고, 농업은행 행원인 B 이등병은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냉큼 나온 것이었다.
결국 농업은행 행원 B는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군대에 안 가는 행운(?)을 얻은 셈이고 또 다른 B 이등병은 집안에서 공들인 보람도 없이 전선으로 가고 말았다. 어디를 가든 요망져야(똑똑해야)지, 미련해서는 손해만 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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