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고국 전시로 서울에서 제주, 도립미술관 10월 30일까지

2. 고국에서 보낸 1년 3개월 

1953년에 변월룡은 북한에 파견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전수하라는 소련 문화성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그를 초청한 북한은 그에게 평양미술대학 학장 겸 고문을 맡긴다. 당시 평양미술대학은 전쟁 직후라 평양을 벗어나 송정리라는 시골에 옮겨 가 있었다. 때문에 대학 건물은 폐허나 다름없었고, 교재조차 변변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변월룡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교재를 직접 만들고, 커리큘럼을 수정하고, 동양화학과를 새로 개설했다. 또, 교수들을 직접 지도ㆍ양성했다.

▲ 북한에 머물 당시, 스케치도 없이 그린 '양지의 소녀'. 자세와 옷의 주름, 얼굴 표정이 자연스럽게 표현됐다. ⓒ뉴스제주

변월룡이 북한에 머문 시간은 15개월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변월룡은 부지런히 북한 명승고적, 북한 주민들의 삶을 그림으로 그려 남겼다. 스케치 작업을 거치지 않고 캔버스에 몇 번 붓질만으로 완성했다는 작품 ‘양지의 소녀’는 옷의 주름, 소녀의 표정, 앉은 자세 등이 자연스럽다. 이것은 사실주의에 기반한 인상주의적 그림이다. 그러나 사실, 이즈음 그가 그린 그림들은 화풍에 구애받지 않는다.   

▲ 그가 그린 43세의 최승희다. 1954년 작품으로, 작품명은 '무용가 최승희의 초상'이다. ⓒ뉴스제주

또, 그는 북한에 머무는 동안 교류하던 북한 예술가들을 많이 그려 남겼다. ‘무용가 최승희의 초상’ 역시 그가 남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그림 가운데 하나다.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43세. 그녀의 행보에 대한 정보가 없던 국내에서는 그녀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값지다. 최승희 외에도 그는 근원 김용준, 화가 정관철과 배운성,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 한설야 등의 초상을 그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 북한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초상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짧은 시간 북한에 머물면서, 그는 평양미술대학과 북한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변월룡은 왜 다시 러시아에 돌아갔을까. 여름철에 발병하는 급성이질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 급성이질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심각한 병이었다고 한다. 상태가 위중해지자 소련은 변월룡의 부인을 북한으로 보내 간호하도록 했고, 다행히도 조금씩 호전되어 갔다. 그러나 돌아가자는 아내의 간청이 있었고, 두어달 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뒤 그는 북한을 떠난다.  

그러나 기다려도 북한으로부터의 초청장은 다시 오지 않는다. 게다가 정치적 상황이 급변함에 따라 그는 차츰 고국에 돌아가는 기대를 접게 된다. 그래도 희망을 품고 그는 북한에서 왕래하던 지인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전시에서는 변월룡이 발송한 편지는 볼 수 없고, 그가 받은 편지들을 볼 수 있다. 그러던 1963년, 완전히 체념한 상태에서 그는 ‘자화상’을 그린다. 

▲ 십 년 가까이 초청장을 기다리던 변월룡이 그린 1963 '자화상'이다. 그의 유일한 자화상이다. ⓒ뉴스제주

“완전히 체념한 상태인 걸 알 수 있다. 눈빛은 우울하고, 눈물이 맺힌 것도 같다. 당시 이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십 년 가까운 고국 방문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접은 것 같다.” 그의 ‘자화상’을 바라보는 문영대 박사의 말이다. 이 그림은 그가 그린 유일한 자화상이다. 흐릿한 눈빛과 슬픔이 가득한 표정이 무겁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그의 심정을 가장 깊이 느낄 수 있는 그림일 것이다. -3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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