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만에 고람수다' 본풀이 송영호 옹 “희생된 기록 한켠에 남겨야”

   
▲ 송영호(82 · 제주 도남)씨가 31일 제주도문예회관에서 열린 '4.3 증언 본풀이 마당'에서 3.1 사건 당시 아버지의 죽음을 증언하고 있다. 송씨는 "구경하는 사라에게 정말로 있어서는 안 될 행동을 관에서 했다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용서하겠다. 그러나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후손들이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제주

송영호(82 · 제주 도남)씨에게 1947년 3.1절 기념대회는 잊을 수 없는 뼈아픈 날이다. 남들이 기뻐하고 만세를 불러야하는 날에 송씨의 아버지는 경찰의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송씨는 31일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제주4.3연구소 주최 '3.1의 기억, 3.1의 현장' 4.3 증언 본풀이마당에서 '3.1 사건, 아버지의 죽음'을 증언했다.

송씨는 “1947년 3월 1일 관덕정 발표사건이 일어날 때 아버지는 당시 식산은행 울타리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본인도 당시 초등학생 4학년으로 시가행진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때 발포하는 총소리가 들렸다”고 말했다.

이어 “발포 원인은 기마경찰이 말을 타고 오는데 어린아이가 말발굽에 치어 넘어졌는데도 그냥 지나갔다. 이를 본 학생과 어른들이 흥분하며 ‘와’하며 나왔다. 당시 목관아에 경찰서가 있는데 그곳 망루에 기관총을 배치했던 것 같다. 공중에 발포하면 됐는데 사람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다. 어린아이까지 해서 6명이 죽었다”고 술회했다.

송씨는 “당시 아버지도 총에 맞아 도립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했다. 우리가 기뻐하고 만세를 불러야 하는 날에 그런 불상사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도 이해가 안간다”고 했다.

4.3 사건 때 도남마을을 불에 태우고, 사람들을 모이게 한 뒤 나이 먹은 남자들을 가려내 소나무밭에서 하루에 몰살시켰다는 증언도 했다.

송씨는 “4.3 사건 당시 도남은 불을 안 붙인다는 말이 있었다. 경비대 시설이고 제주도에서 창설한 부대가 있고 입소한 사람 둘 때문에 불을 안태운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소문이지만, 신제주 도청 옆에 ‘가새기 오름’이라고 있는데, 여기서 좌익분자들이 회의를 하는 중 정보기관에서 정보를 입수해 기습한다고 하니까 도남으로 도망치자, 폭도 동네라고 해서 불을 붙였다. 마을이 불에 탄 후 형님은 숨어 살다가 행방불명 됐다”고 했다.

송씨는 “도남 사람만 죽은 것이 아니다. 오등, 죽성, 고다시 사람들도 죽었다. 도남에는 불을 안 붙인다고 하니까 피난을 왔다가 잡혀서 총살을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송씨의 어머니는 충격이 컸지만 어린 자식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갖가지 고생을 했다.

송씨는 “살아야 되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본인도 얻어먹고 살기 위해 남의 집 머슴으로도 가봤다. 먹고 살기가 그렇게 힘들더라. 사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살려고 하면 창피한 것도 무릅써야 한다”고 술회했다. 

송씨는 “과거는 용서는 하되, 기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4.3 평화공원에 가보니 3월 1일 돌아가신 분들 명단에 아버님 함자가 ‘윤’자인데 ‘수’자로 나왔길래 유족회 회의 때 바로 잡아달라고 요청해서 바로잡았다. 그 다음에 또 가보니 기록이 어디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송씨는 “1947년 3월 1일 희생된 사람이라는 기록은 어느 한 켠에 남겨줘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나중에 우리 자손들에게라도 이야기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있어서는 알될 행동을 관에서 했다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세월이 가고 용서는 하되, 그렇게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사실만은 후손들이 잊지 말아야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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