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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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펄럭이는 건, 바로 고려군의 깃발이었다. 그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는 금세 저 멀리 산을 가려버릴 정도였다. 거침없이 행군하던 부대는 우리를 발견하더니 일단 속도부터 늦추기 시작했다. 거기서 기마병 몇몇이 확 튀어나오더니 돌진하듯 다가왔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올 무렵, 그들이 내민 건, 칼끝과 창끌이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우리를 둘러싼 기마병이 괜히 한 번씩 창과 칼을 아슬아슬하게 갖다 대려고 했다. 여기서 우린 오히려 손에 쥐고 있던 무기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부터 번쩍 들었다. 이것도 시원치 않아서 아예 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시늉까지 펼쳐보였다.

우리의 행동이 먹혀들었을까, 기마병들이 말에서 내렸다. 여전히 저들의 칼끝은 우리를 향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과 달리 행동에 날이 바짝 서진 않았다.

“누구냐고 묻지 않더냐!” 물론 내 목에 칼을 들이민 자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먼저 내가 일어나서 신분을 밝혔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으나 다른 군사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한 번 신분을 밝혔다. 그리고 당신네들이 모셔온 장군을 뵈야겠다고 하니, 거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앞뒤 얘기도 없이 우리 장군을 뵈시겠다? 꽤나 영리한 놈이구나!”

칼등으로 뒤통수를 후려친 그였다. 우리는 순식간에게 온몸이 포박된 채 고려군 진영으로 끌려갔다. 다시 한 번 장군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으나, 창대 허리와 등을 후려칠 뿐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중간중간 척후병이 드나들었으나 좀처럼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별다른 얘기도 없이 나아가다가 당도한 곳은 바로 포구였다.

삼별초와 함께 상륙했던 바로 그 자리, 거기다 저 앞바다에는 수십척의 배가 들어오고 있었는데. 고려군의 군함이었다. 포구 한가운데 군영이 꾸려지고, 우리는 대충 세워놓은 막사에 잠시 갇혀 있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막사 바깥으로 끌려나왔는데 거기엔 부장으로 보이는 자들이 모여 있었다. 가장 먼저 나를 묶었던 기마병도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고. 우리를 한가운데 무릎 꿇려 앉히더니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살고 싶은 게냐?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솔직히 고하거라.”

그중 얼굴에 주름이 깊은 자가 몸을 일으켰다. 내게 한 발자국 다가오더니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대뜸 내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곧바로 대답했지만 믿지 않았다. 수십년간 전투 경험상으로 절대 개경에서 나올 수 없는 얼굴이라나? 아무리 봐도 북쪽 지방, 아주 추운 곳에서 태어난 형태라고 단정지었다.

나랑 함께하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고향을 물었고, 대답에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거의 삼별초로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군사들 중 누구도 여기서 한마디도 반론을 내놓지 못 했다. 오히려 당장 우리의 사지를 찢어서 삼별초의 행방을 캐내자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리하여 난 몸부림과 함께 당장 장군을 불러달라고 소리쳤다.

“네놈이 어찌 장군만 찾는 게냐. 따로 수작이 있구먼, 뭐냐 고하지 못 할까?”

그의 손바닥이 내 뺨에 불을 일으켰다. 스치는 건 잠깐이었지만 머리가 핑 돌고 말할 때마다 입술이 시큰거릴 정도로 위력이 만만치 않았다. 오죽했으면 내 옆에 앉아있던 자가 머리로 그에게 달려들려다가, 다른 군사들의 손에 붙들려 발길질만 소낙비처럼 감당해야만 했다.

지금 확실한 건, 진도에서 삼별초를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다는 것. 거기다가 개경이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 넘어온 군사들이라 추측이 가능했다. 그러니, 내가 아는 개경 쪽 무인들의 이름을 이들은 하나도 알아듣질 못 하였다. 다시 한 번 장군을 뵈어야겠다고 요구하였다. 나와 함께하던 자들이 마치 미리 신호라도 준 듯, 한목소리로 ‘장군’이라 외쳤다. 그러자 군사들이 둥그렇게 에워싸더니 창과 칼로 내리찍으려고 하지 않던가? 바로 그때였다.

“어찌 그리 소란스러운 게냐?”

저 뒤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군사들은 우리에게서 물러나더니 자리를 내주기도 하였다. 드디어 이 부대를 이끄는 장군의 다가왔다. 전반적으로 풍채가 크고 얼굴이 거뭇거뭇하지만 주름이 적은 걸로 보아 그리 나이가 많아보이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신의 수하들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나머지 군사들은 애써 그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어찌 나를 찾으시는가?”

우리를 둘러싼 군사들을 손짓으로 더 물러나게 하더니, 직접 몸을 일으켜주었다. 팔과 몸을 세차게 꽉 묶었던 포박도 풀어주기도 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별다른 얘기 없이, 자신의 막사로 따라오라 손짓했다.

“당신만 들어오면 되겠소.”

막사 앞에서 자신의 수하와 나와 함께한 자를 세워뒀다. 단둘이 막사에 들어가 탁자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먼저 별다른 말 없이 수염을 매만지며 나를 위아래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도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어르신의 사위란 말씀이오?”

그는 나의 장인어른을 알고 있었다. 아주 깊은 인연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의 안면은 있는 사이였다. 대략 나의 존재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런데 탐라가 아닌 진도라, 그것도 삼별초가 사라진 장소에서 나를 만날 줄은 전혀 예상치 못 했다면서, 다시 한 번 나의 신분과 장인어른에 대해 질문하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썩 개운치는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더 이상 뭐 보여주고말 것도 없었다. 그저 탐라에서 여기까지 온 과정을 상세히 말하는 게 당장할 수 있는 전부였다.

“생각보다 역당들의 저항이 거세긴 하오. 이를 어쩌면 좋담.”

그도 알고 있었다. 삼별초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그리고 진도에서 삼별초의 주력부대를 만날 것도 파악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하지만 진도 인근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삼별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밝혔다. 지금으로선 진도에 거점을 두고 삼별초를 추적해야 할 상황인데.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진짜 그가 원하는 건, 탐라에서 삼별초를 완전히 사로잡는 것. 하지만 그러기엔 배가 넉넉지 않았고, 상부에서 허락한 부분도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절대 바다로 나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오로지 땅에서 그들을 상대하며, 최대한 전면전도 피하라고도 명했다는데. 도대체 그런 방식으로 어떻게 삼별초를 이기려고 하는지.

간단하게 고려군의 상황을 들었지만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난 탐라 깊숙한 곳을 파고들어야한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말인데…….”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깥에서 대기하던 수하들을 불러들였다. 그중엔 나를 여기까지 포박해서 온 기마병도 함께 있었다. 그들도 눈만 끔뻑이며 그의 입만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내 수하들과 탐라로 가시오. 지금이 아니면 다신 기회가 없을 테니.”

난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다시 탐라라니, 순간 내 귀를 의심하고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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