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작가의 역사 장편소설

▲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날이 밝았다. 지난밤, 지슬의 도움으로 잠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당장 피해서 될 일인가, 약간의 의문은 있었다. 그러나 당장 오른쪽 어깨가 찢어질 듯 통증이 몰려왔다. 팔을 마음대로 들기 힘들 정도였고, 그 여파는 온몸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이디 고마이 이십서.”

지슬이 다가와 물을 건넸다. 바짝 마른 입술부터 적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로 쌓아올린 담과 그 너머의 바다, 처음 탐라에 왔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맑은 하늘에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 나도 모르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지금의 모습으로만 완전히 멈춰있을 수 있다면 탐라를 뒤덮은 진한 피비린내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까? 잠시 생각에 잠기려던 그때, 멀어지는 지슬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려군사 차림이었지만 양손에 무기 하나 없이 축 늘어진 어깨를 짊어지고 걷는 모습이 왠지 더 무거워만 보였다. 곧바로 뒤따르고 싶었지만 어깨부터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주저앉아 문밖 너머로 서서히 작아지는 지슬만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저 잔잔할 것만 같았던 파도가 갑자기 거친 바람과 함께 몸집을 불려 나갔다. 저 멀리 풍경처럼 바위를 내리치던 것이, 바로 눈앞까지 치고 올라왔다. 당장 내가 앉아 있는 곳이 물결에 완전히 휩쓸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지슬은 해가 저물어가도록 소식은 없고, 주변에 다른 인기척도 느끼지 못 했다. 사라진 인적을 대신하려는 듯, 비바람은 점점 가까워졌다. 천장이 흔들렸고 물도 새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기둥이 살짝 휘어진 것도 직접 보고야 말았다. 여전히 어깨는 온몸 전체를 잡아당겼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 노릇도 아니었다. 점점 바깥에 어둠이 짙게 드리우려하니, 당장 손에 잡히는 것들부터 대충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비바람이 한 치 앞도 제대로 내다볼 수 없이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말았다. 뒤로 물러설 새도 없이, 집 안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발이 닿는대로 걷고 또 걸었다. 온몸은 완전히 젖어들고 오른쪽 어깨는 점점 무딘 칼로 찢어내듯 바닥으로 축 늘어뜨리려고 했다. 바다와 점점 멀어졌고, 잠시 뒤를 돌아보았을 땐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곳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비바람이 눈앞을 가리운다지만 어느 정도 형체라도 있을 법한데, 그조차도 꿈을 꾼 듯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돌아갈 곳도 완전히 없어진 셈이지만 더 이상 어디로 가야할지 발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비바람의 강도는 점점 거세어졌고, 허허벌판 한가운데 버티는 어린나무처럼 덜덜 떨면서 서 있었다. 그조차도 바람은 허락하지 않았다. 주변의 작은 돌들이 제법 높게 떠올려 내 곁으로 달려들었고, 나뭇잎 몇 장이 오른쪽 뺨을 예리하게 스쳐 지나갔다. 살짝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으나 미처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다시 발을 떼었다. 약간 경사가 가파른 언덕에 나무 한 그루의 형상이 어렴풋하게 드러났다. 오로지 그곳만 바라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나무 앞으로 다가가자 바람은 어느 정도 막아내고 있었다. 제법 둘레가 큰 녀석이었다. 나뭇가지에 달린 잎도 바람을 온전히 견뎌내고 있었다. 몸을 기대어 주저 앉았다. 여기까지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자세하게 보이는 건 없었다. 다만 저 너머 지슬이 이끌어줬던 거처에서 보았던 그 바다의 물결이 선명할 뿐. 당장 누구라도 삼키지 않으면 멈추지 않은 한 마리의 성난 짐승과 같았다. 어쩌면 저것은 나를 노리지 않았을까? 기꺼이 제물이 되겠다는 호기마저도 내겐 없었다. 당장 숨 쉬는 것조차도 버거웠을 뿐이었다.

눈이 스르르 감기려고 할 때, 낯선 그림자가 보였다. 조금 전 나와 거의 비슷한 움직임으로 겨우겨우 한 발씩 떼어내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일단 왼손에 질척한 흙이라도 한줌 꽉 쥐여 보았다. 그러나 그림자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서도 흙을 쥔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조차도 난 목석이라도 된 듯 가만히 앞만 보기만 할 뿐이었다. 저 멀리서 내려다볼 때까지만 해도 낯선 존재였지만 내 옆에 앉은 순간부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참, 당신도 어지간하오리다.”

귓가에 맴도는 그의 목소리, 다름 아닌 김통정이었다. 날이 어둑하니 아무리 가까이 다가와도 제대로 얼굴을 알아볼 순 없었다. 그러나 살기 어린 눈빛, 낮게 내리 깔린 목소리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나를 먼저 알아차리지 않았던가?

“도대체 당신은 왜 여기 있소이까?” 그는 말을 매끄럽게 이어나가진 못했다. 한 글자씩 힘주어 내뱉는 게 느껴졌다. 비바람 속에서 풍기는 독한 피비린내는 비단 나만의 것이라 할 수 없다. 어쩌면 그가 이 자리에 앉기 전까지 쓰러뜨린 수많은 이들의 숨결이 아닌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왜 여기에 당신이 있느냐고. 또 하나 묻겠노라면, 왜 여태까지 탐라를 떠나질 못 하는 건지. 그러나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말 궁금했지만 막상 던져둔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을 차마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저 숨을 조금 더 깊게 내뱉는 것이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살아야 하오. 당신이나 나나.”

그는 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비바람 하나도 감당못할 하찮은 우리 몸뚱아리가 겨우겨우 살아낸다면 무엇을 더 해내야만 할까? 살고 싶다는 그의 목소리가 내 목을 꽉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그와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해왔는지 분명 기억은 할 것인가? 난 기록을 하고 싶어 여기까지 왔고, 그는 기록에 남고 싶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 둘 다 완전히 사라질 수만 있다면 누구도 기록하지 않고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기록하지 않아도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허나, 난 당신이 더 살았으면 하오. 별다른 뜻은 없소이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허리춤에 날을 바짝 세운 칼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손은 칼로 향하지 않았다. 나무의 부축을 받아 일으킨 몸으로 다시 한 발자국씩 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터벅터벅 비바람에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으면 어둠속에 자신의 몸을 맡기었다. 나도 당장 일어나 뒤따르고 싶었으나 왼손에 쥔 흙조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걸까? (계속)

▲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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