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우리 앞에 큰 오름 하나가 가로막았다. 마침 노인의 손가락도 저곳을 가리켰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자를 만난다는 건, 목숨은 내려놓아야 할 것이오.”

노인이 가장 먼저 앞장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을 주고 있었지만 분명 떨렸다. 삶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고 했으나 손끝이 떨리는 것도 숨길 순 없었다.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일 터. 수도 없이 생명과 멀어지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의연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구면인 김통정 그와 다시 만나는 순간도 다시 그 고통과 만날 것이란 점,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다시 만나야만 한다. 고려와 탐라를 살릴 작은 실마리가 될 수도 있으니.

“피해!”

잠시 눈앞이 흐려지고 할 때, 가장 앞장섰던 노인이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나를 비롯해 나머지도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사방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당장 내 몸에 닿는 풀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어디로 숨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없으나, 낯선 기운은 분명히 느껴졌다. 신음을 크게 내뱉은 노인 저 너머로 우릴 향한 날카로운 기운, 순간적으로 살기어린 눈빛도 스쳤을지도 모르겠다. 바람름을 예리하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다른 이도 함께 쓰러지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나와 가까워졌고, 머리 위로 화살 한 발이 스치기도 했다. 나는 주저앉고 당장 손에 닿는 바위에 바짝 붙었다. 머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뒤통수도 막았다. 눈을 질끈 감고 생각했다. 벌써 그 순간이 온 것일까?

바람이 갑자기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차가운 것들이 쏟아졌다. 다행이었을까, 주변을 위협했던 날카로운 바람 소리는 잦아들었다. 그러나 온몸이 젖어들수록 사방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바닥도 축축해지더니 몸의 중심도 잡기 힘들어졌다. 일단 몸부터 일으켰다. 천천히 천천히, 당장 내 주변에 그림자나 사람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다들 괜찮으냐고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더 강하게 몰아치는 비바람뿐이었고 난 눈도 채 뜨지 못 한 채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몸은 완전히 젖어버렸고, 발은 무거웠다. 움푹 패인 곳에 헛디뎌 넘어지기도 일쑤였다. 그러나 멈춰서는 안 되었다. 여기서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다시 일어나 나아갔다. 어렴풋하게 멀리서 보였던 오름이 코앞에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어디로 향하는가였다. 깊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바람이 잠잠해질 기미가 없으니, 일단 어디든 몸을 피해야만 했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굉음과 함께 나무 기둥이 점점 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얼른 몸을 옮겨 오름 안쪽으로 향하였다. 가팔라지는 경사에 숨을 내뱉으며 한 발 한 발 올랐다. 그러나 마음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분명 올라가는 듯했으나 발이 미끄러져서 계속 제자리에 머물렀다. 마치 땅이 발목을 붙잡는 것처럼. 방향을 바꾸었다. 바람을 등지고 조금 더 나아가자, 작은 동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들을 걷어내고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막상 들어오니, 꽤 넓었다. 머리 위로도 한참 공간이 남았고, 더 깊숙하게 들어갈 곳도 보였다. 일단 입구 쪽에 앉아 비바람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다시 한 번 생의 마지막 순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한숨이 깊게 나왔고 온몸은 축 처지더니 눈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어쩌면 아무도 모를 이곳이 나을지도 몰라, 힘이 축 빠지던 차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등 뒤로 소리가 들렸다. 그냥 물방울과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움직였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바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림자 하나가 나를 덮쳤다. 둔탁하고 거친 손이 내 목을 사정없이 조르기 시작했다.

“넌 도대체 누구냐!”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의 형체를 자세히 보았다. 눈앞이 흐려지고 정말 숨이 넘어가려던 순간, 그의 이름을 힘껏 불렀다. 김통정!

“자네는?”

숨통이 트였다. 목을 조르던 손은 어느새 찬 바닥에 눕혔던 머리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맞았다, 머리가 얼굴을 뒤덮었지만 눈빛만으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놀란 것은 나보다 오히려 그였다. 조금 전 짐승처럼 나를 덮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귀신을 본 것처럼 계속 눈만 끔뻑끔뻑거렸다.

“어찌된 일인가.”

아마 그는 내가 완전히 죽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살아있더라도 굳이 자신을 찾아오리라고도 예상치 못 했을 터. 그러나 어떤 대답도 꺼내지 않았다. 목이 아플뿐더러 무슨 얘기부터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벽에 기대어 앉아 그를 계속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지금에 와서 자네가 어찌 여기까지 왔는지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라를 잃은 장수가 하찮은 목숨 하나 연명하려 이 모양이니.”

한숨을 쉬던 그가 잠시 멈춰있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동굴 안쪽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려고 할 때,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가 고개를 내저으려고 할 때,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동굴 바깥이었다. 빗소리에 희미하긴 하나, 한두 사람의 소리는 분명 아니었다. 그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아당기더니 안쪽으로 이끌었다. 안쪽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 통로는 점점 좁아지더니 온전히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예 바닥을 기어서 등이 천장의 바위과 닿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의 발소리를 따라 조금씩 더 들어갔다. 위아래 양옆으로 좁혀오는 통로에 온몸 구석구석이 찢어질 듯 아팠고 숨도 조여왔다. 그의 발끝도 시야에서 사라지고, 오른쪽 팔꿈치로 온몸을 끌어당겨보았다. 반쯤 젖은 흙이 얼굴을 온통 덮어 목이 잠기려고 할 때쯤, 그의 손이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구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아주 넓은 공간이었다. 그것도 김통정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닌 수많은 눈빛들이 나를 향해 있었다. 과연 이곳은 무엇이란 말인가. (계속)

소설가 차영민.
소설가 차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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