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작가의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차가운 시선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김통정은 다시 손을 내밀었고, 양옆으로 한 사람씩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은 좀처럼 들어가질 않아, 휘청거렸으나 양팔을 붙든 이들이 견고하여 다시 주저앉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려 김통정과 함께 서 있는 자들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옷차림새는 여느 탐라 백성들과 큰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군데군데 해진 것이 걸치지 않는 것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저들의 손과 허리춤에 자리 잡은 무기들은 스치는 바람을 베어낼 듯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드디어 우린 함께 살 수 있을 걸세.”

김통정의 목소리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거의 소멸할 듯 힘이 빠졌던 눈빛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났다. 심지어 자신과 함께 있는 자들도 웃음까지도 주고받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과 함께 산속 깊은 곳으로 한참 따라 들어가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처음 보는 마을이었다. 분명 산 중턱 정도 되어 보이나, 저 멀리 바다와 성들이 한눈에 드러났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나무들이 제법 높긴 했으나 그 사이로 탐라의 중요한 구역들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손을 뻗으면 저곳 어딘가 있을 지슬의 어깨를 두드릴 정도였다. 

“요새 중 요새로구나.”

김통정은 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민가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았고, 돌로 낮게 쌓은 성벽들이 마을 전체를 둘렀지만 모양새는 산속에 들어선 작고 한적한 마을 그 자체였다. 나를 데려온 자들 말고도 마을에도 제법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보였는데, 노인과 여인 아이들까지도 고루고루 보였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김통정과 그 일행을 보며 모두 시선을 돌리기 바빠 보였다. 저 멀리서 다가오던 한 여인은 우리 쪽을 보더니 황급하게 발길을 돌려 자취를 감추었다. 그 모습을 오직 나만 본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이내 큰 비명과 함께 여인을 다시 데려오고 있었다. 머리채를 붙잡고 바닥에 질질 끌어서.

“어찌 몸을 숨겼던 것이냐?”

김통정과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자가 목청을 높였다. 그는 몸집이 크고 눈매가 짐승과도 같았는데, 김통정 앞에서만 그저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다. 여인을 향한 그의 모습은 그저 목청만 높인 건 아니었다. 거칠게 숨을 내뱉은 여인이 목도 가다듬기도 전에 거친 발길질을 아끼지 않았다. 누구도 말리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통정도 그저 팔짱을 낀 채 지켜보기만 할 뿐. 오히려 내가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양옆에 선 자들이 동시에 고갯짓을 했다. 여인은 그 자리에서 눈도 채 감지 못 한 채 바닥에 얼굴을 붙이며 완전히 멈추고 말았다. 그 순간, 주변의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각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분명 알 수 있었다. 이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있었다는 것을. 

“마저 수습하고 우리는 들어감세.”

김통정이 먼저 길을 재촉했다. 조금 전의 일은 마치 잊어버린 것처럼, 다시 웃음을 찾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 사이 온몸에 빠졌던 기운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김통정 일행과 완전히 멈춘 곳은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민가였다. 마당은 제법 넓었으나 집 자체가 그리 크진 않았다. 주변을 둘러싼 돌담이 마을 전체를 둘러싼 것보다 더 크고 높은 게 눈에 띄었다.

“자네들이 탄탄히 준비해둘 줄은 몰랐네.”

어느새 나를 비롯해 사람들은 마당 한가운데 모여 김통정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처음 보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탐라에서 고려를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그 강건한 기백이 미소 띤 얼굴에서 되살아난 듯했다. 그는 내게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에 서게 만들었다.

“이 자는, 조정의 충신일세.”

그 한마디에 나를 향한 눈빛은 날이 세워졌다. 차가운 바람도 목 주변을 에워쌌다. 그것도 잠시, 김통정은 다시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앞으로 우리가 다시 찾을 조정의 공신이 될 것이란 말일세, 자네들처럼!”

나머지 사람들도 김통정과 함께 웃음과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좀처럼 표정과 온몸에 들어간 힘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충신이고 누가 공신이란 말인가. 한순간도 김통정과 뜻을 함께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내 역할은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있는 그대로 모두 기록하고 전하는 것일뿐. 그러나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을 온전히 기억할 수 있을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지 자신은 없어졌다. 숨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은 반복된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더욱더 명확해졌다. 이들의 정체를 밝히고 앞으로 김통정의 행보에 집중해야 할 것, 이 마을과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온 자들인지도 명확히 알아야만 했다. 

눈앞에 서 있는 자들 너머에서 불어온 차가운 기운을 아직도 느껴졌다. 거기다가 발밑을 미세하게 울리는 강력한 진동도 함께. 이곳은 과연 탐라의 운명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순간들의 연속에, 다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살아야 한다, 모든 기록을 온전히 담아가리라. 왼쪽 어깨에 손을 얹은 김통정의 올라간 입꼬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진실인 건가. (계속)

소설가 차영민.
소설가 차영민.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