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작가의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김통정 앞에 모인 사람들의 환호는 뜨거웠다. 어떤 폭풍에서도 쓰러지지 않을 바위와도 같은 기개가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모습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소리를 내지르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자도 있었다는 것. 나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한숨을 감추지 않는 노인 곁으로 다가갔다. 어째서 어깨가 축 처졌느냐고 물어보았다.

“이제 편히 살아보나 했는데.”

속삭이듯 내뱉는 그의 목소리와 함께 날이 선 눈빛은 김통정에게도 향하였다. 얼른 그의 가로막았다. 하마터면 김통정이 발견할 뻔했으나 계속 이어지는 환호 속에 자연스럽게 가려질 수 있었다. 그를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데리고 나왔다. 근처에 조용히 자리 잡은 나무 아래로 데려갔다. 허리가 굽고 걸음이 더뎠지만 그리 시선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자넨 어째서 저자를 따르는가.”

서로 마주 보자마자 그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가늘었으나 날은 예리하게 세워져 있었다. 분명 이곳에 모인 자들은 김통정을 추종할 터인데 어째서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지 물어보았다. 

“저자가 좋아서 모인 사람은 거의 없을 거요.”

자세한 내막을 들어보니 그랬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삼별초와 관련이 있었다. 직접 전투에 나선 자들은 아니었고, 군량이나 거처나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줬던 자들이었다. 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두 내어주면서 버텨낸 셈이었지만, 고려군이 탈환한 이후 상황은 달라지고 만 것이다. 삼별초를 피해 달아났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왔고, 그들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역당으로 몰기 시작했다. 하나둘 고려군이나 몽골군에 잡혀갔고 그 이후로 살아서 돌아온 이는 없었다. 겨우 몸을 피한 이들은 계속 다른 지역으로 옮기다옮기다 김통정 일행이 탐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온 것이었다. 삼별초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이들은 어디에서든 정착할 수 없었으니, 차라리 이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게 나으리라. 그렇다고 탐라에 따라 내려와서 삼별초와 직접 접촉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극히 일부만 동태를 살피려고 자원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탐라 곳곳에 숨어들어 각자 자리를 잡았다. 탐라 백성들은 이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주었으며, 낯선 곳이었으나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소중한 것이었다.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여몽연합군이 탐라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또다시 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삼별초 잔당 소탕에 혈안이었으므로 탐라 백성들을 다그쳐 이들을 하나씩 색출해내기 시작했다. 친절한 이웃들도 자신들을 위협하는 칼날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흩어진 자들은 다시 산속 깊은 곳에서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처음 탐라 땅을 함께 밟은 사람들의 절반에도 못 미쳤으나 이들은 끝까지 살아낼 의지가 있었다. 결국 마을을 하나 만들어냈고, 탐라에서도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상황을 했던 터였다. 그러나 마을 자체가 가진 자원이 극히 한정적이었으므로, 식량 문제가 심각했다. 하나둘 외부와 은밀히 소통하며 마을을 꾸려나가긴 했으나 그마저도 나간 자들이 하나씩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 심각함을 느끼던 차였다. 이대로 무력하게 죽을 것이라면, 차라리 탐라를 완전히 장악하자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제대로 군사 교육도 받지 않았던 터. 그나마 젊은 이들이 있었으나 젊다기엔 너무 어렸고 누군가 제대로 가르칠 사람도 없었다. 반대로 여몽연합군에 투항해서 마을 자체를 보존받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모두 동의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김통정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아직 싸움의 끝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오히려 탐라를 완전히 장악하고 싶은 마을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살고자 여태 버텼는데 다시 죽이려 들다니.”

노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얼른 부축해서 일으켜주려고 했으나 손을 내저었다.

“자네도 저자와 같은 마음인가?”

말 한마디에 가슴을 푹 찌른 느낌이었다. 김통정의 마음은 좀처럼 알 수는 없다. 다만 그와 함께하려는 것은 그가 있어야 조정이 움직일 것이라는 믿음이다. 설령 조정에서는 반역자로 여기겠지만, 탐라를 살리려면 그가 살아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뜻을 노인에게 고스란히 전할 수 없었다.

“얼른 이곳을 떠나시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의 손이 내 다리로 향하였다. 애써 힘주어 밀어내는 시늉이었지만 조금도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몇 번 더 밀어냈으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머리를 올려 나와 한참 눈을 마주쳤다. 

“살아서 돌아가길 바라네.”

노인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사이 모였던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고, 김통정이 다가왔다.

“어째서 혼자 여기 있는 겐가.”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앞에서 웃음기를 감추지 못 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 전 노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것. 김통정과 함께일까, 나 혼자일까. 모든 뜻은 누구에게 구해야 할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계속)

소설가 차영민.
소설가 차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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