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아픔 숨겼던 할머니, 74년 만에 '무죄'
제주 4.3 아픔 숨겼던 할머니, 74년 만에 '무죄'
  • 이감사 기자
  • 승인 2022.12.0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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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때 억울하게 끌려가 고문···거짓 자백으로 징역 1년 옥살이
박화춘 할머니 "과거 창피해서 자녀들에게도 숨기고 살았다"
재판부와 검찰, 제주어로 할머니 위로해준 배려 돋보여
▲ 박화춘 할머니가 4.3 당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Newsjeju
▲ 박화춘 할머니가 4.3 당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Newsjeju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피고인이 약 7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과거 제주 4.3 사건 피해 당사자로, 희생자 결정이 되지 않은 피고인 중 첫 사례다.

6일 제주지방법원 제4-1형사부(부장판사 장찬수)는 과거 '내란죄'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생존 수형인 박화춘(96) 할머니 재심 선고 공판을 진행했다. 

박화춘 할머니는 제주 4.3사건 당시 마을 사람들이 끌려가는 등 위험에 처하자 서귀포 강정리 밭에 숨어지냈다. 1948년 12월 큰아버지 제사를 위해 어머니 집으로 향하던 중 모르는 사람의 권유로 산으로 향했다. 

따라간 산속에는 굴이 하나 있었고, 그곳에서 박화춘 할머니는 토벌대로 추정되는 사람에 의해 체포돼 서귀포경찰서에 수감됐다가 제주경찰서로 이감됐다. 

당시 할머니는 자신의 체포·구속 사유를 알지 못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는 고문도 당했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리는 고문을 견디지 못한 박화춘 할머니는 거짓 자백을 했다. 21살의 젊은 나이와 불법으로 자행된 고문 앞에 할머니가 할 수 있는 대안책은 없었다.

"남로당 무장대에 보리쌀 2되를 줬다"는 거짓 자백으로 할머니는 제대로 된 절차 없이 징역 1년을 살게 됐다. 

배를 타고 목포를 거쳐 전주형무소에서 3개월을 복역했다. 그곳에서는 3살 된 딸과 함께 지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될 때는 딸을 보육시설에 맡겨야 했다. 할머니는 출소 후 귀향길에 전주에 있는 딸을 찾아 제주도로 내려왔다. 

▲ 제주지법 장찬수 부장판사가 박화춘 할머니 '내란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Newsjeju
▲ 제주지법 장찬수 부장판사가 박화춘 할머니 '내란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Newsjeju

이날 재판에서 박화춘 할머니는 "밭에 숨어지내다가 제사를 위해 길에 나오다가 어떤 사람을 따라갔더니 어깨에 총을 멘 사람들이 있었다"며 "경찰 고문을 견디지 못해 거짓 진술을 해 1년을 형무소에서 살다 나왔다"고 진술했다. 

4.3 사건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는 이제껏 과거를 숨기고 살았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과거가 창피해서 말을 못 했다'는 사유다. 올해 4월 동네 주민에게 4.3 재심 이야기를 듣고 온 할머니는 아들에게 처음으로 과거를 털어놓게 됐다.

박화춘 할머니 사연을 접수한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은 희생자 신청이 되지 않았지만, 형사소송법상 재심 조건을 충족한다고 판단해 재심을 청구했다. 

검찰은 "피고인이 내란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기에 무죄 판결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법원은 "공소사실 유죄 입증 책임은 검사에게 있으나 죄를 증명할 증거가 없다"며 "검찰에서도 무죄 선고를 요청한다. 이번 사건에 대해 무죄를 판결한다"고 말했다. 

현재 군사재판 수형인 2530명 중 957명이 개별 청구 또는 직권재심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박화춘 할머니도 무죄를 받으면서 958명이 누명을 벗게 됐다. 

▲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 변진환 검사가 제주어로 할머니에게 말을 하고 있다. ©Newsjeju
▲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 변진환 검사가 제주어로 할머니에게 말을 하고 있다. ©Newsjeju

재판은 고령의 박화춘 피고인에 대한 배려가 돋보였다. 오래된 제주 사투리만 사용하는 할머니의 진술에 재판부는 표준어로 해석을 요청해 방청석을 향해 풀어 설명해주기도 했다. 또 검사와 재판부는 제주어를 사용하면서 할머니에게 잘못이 없음을 강조했다.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 변진환 검사가 박화춘 할머니에게 전한 제주어는 다음과 같다.

"할머니, 잘못한 거 어수다. 4.3사건 때 할머니 잘못헌 것도 어신디 사람들이 막 심엉강으네 거꾸로 돌아매고 허영으네 막 고생 많아수다. 제가 재판장님한티 할머니 잘못한 거 없댄 잘 고라시난예 아무 걱정 허지 맙서예. 경허고 너미 부치로왕 안해도 되어마씨. 할머니 잘못한거 어시난예. 할머니는 그저 마음 편안허게 가지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 됩니다예."

번역) 할머니 잘못하신 거 없어요. 4.3 사건 때 할머니 잘못도 없는데 사람들이 데리고 가서 거꾸로 매달리는 등 고생 많았습니다. 제가 재판장님에게 할머님 잘못 없다는 취지로 잘 말씀드렸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너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할머니 잘못하신 것 없으세요. 할머니는 그저 마음 편하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 됩니다.

제주지법 재판장 장찬수 부장판사는 "할머니, 오늘 판결로 예전 옥살이 억울함 다 풀려졌수다(풀려졌어요)"라고 배려 섞인 말을 전했다. 

약 70년의 억울함을 풀게 된 박화춘 할머니는 무죄를 이끌어내기까지 노력해 준 재판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거듭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또 자신은 먼저 죽은 자녀보다도 100살 앞두고 오래 살고 있다는 말을 반복하며 지난 삶을 회상했다. 

할머니의 말을 경청한 재판부는 "주변 사람들을 더 걱정하시는 것을 보니 정이 참 많은 분 같다"고 존경의 뜻을 표했다.

이 말을 들은 박화춘 할머니 아들은 "어머니가 고집이 좀 있으신 편이다"고 답했다. 재판부와 방청석에 자리한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재판은 종료됐다.

한편 이날 재판을 찾은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어르신 말씀을 들으면서 감정이 북받쳤다"며 "4.3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해 노력하는 재판부와 합동수행단 검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억울한 희생자가 없도록 제주도도 뒷받침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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