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사회는 규제만 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 철학의 학파이다. 쾌락은 개인주의에서 비롯된다. 개인이 전체를 바꿀 수 없고, 전체를 위해 희생할 필요도 없으며, 그 전체에서 벗어나 은둔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 철학이 '에피쿠로스 철학'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 학파와 쌍벽을 이룬 학파가 '스토아학파'다. 그들은 개인보다는 전체를 먼저 생각한다. 소위 ‘대(大)를 위해 소(小)는 희생되야 한다’는 주의를 가진 철학이다. 그래서 그들을 ‘강당의 철학’이라 하고 에피쿠로스 학파를 ‘정원(庭園)의 철학’이라 한다.

정원에 핀 꽃 한 송이를 보며 기뻐하는 철학이 에피쿠로스 학파이다. 그들에게 국가나 사회는 그들의 개인적 행복을 추구해 주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종 규범과 제약으로 그것에 걸림돌만 된다는 것이 에피쿠로스 학파의 생각이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개인은 희생될 수도 있다는 스토아 학파와 달리 국가사회지도층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왜냐하면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노자의 ‘도덕경’이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배척을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주의를 추구, ‘인위적인 제도나 규범을 만들어 내는 -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 현자의 지혜를 끊어버려야만 백성들의 삶이 오히려 증진되는’ 절성기지(絶聖棄智)와 ‘인(仁) 의(義) 등 소위 도덕이라는 것이 없어져야만 부모와 자식에게 효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되살아난다’는 절인기의(絶仁棄義),‘위정자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 이익을 탐하지 않는다면 사방에 도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절교기리(絶巧棄利)의 무정부사상으로 노자의 철학은 국가지배이념에서 배척을 받았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인간의 정치적 활동이 그다지 고상한 활동이라 여기지도 않았고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봐도 국가나 사회가 개인을 위한 필수적인 제도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노자의 사상처럼 있기는 있되 소극적인 개념, 즉 ‘재산이나 권력이 우리를 대중들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하게 지켜줄 수는 있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안전은 우리가 그들로부터 떠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인가가 문제다. 대 가족제가 해체되고 핵 가족화의 길에 들어서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우선시 되는 사회에서 ‘센세이셔날리즘’과 ‘섹슈얼리즘’의 만연은 당연한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한 무정부적 개인주의는 우리 모두를 회색도시의 ‘외사냥꾼’으로 만들어 가고 있으며, 그러함 속에서 자신의 쾌락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치관이 극단적 이기주의로 변모, 폭력화 돼 가고 있다면 잘못 보는 것일까. 남녀를 불문하고 중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까지 손을 뻗치는 ‘일진회’의 폭력은 바로 이러한 개인주의에서 비롯되는 쾌락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걸어가면 다른 학생들이 피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고 말한 한 일진회 소속 학생의 털어놓는 말을 들으며 그러한 쾌감 속에는 자기만족 외의 배려의 마음은 한 올도 없는 냉혹함이 담겨져 있다.

공공(公共)을 먼저 생각하고 사익(私益)을 다음으로 미루는 선공후사(先公後私)는 시대에 밀려 분해되고 오히려 도덕과 규범을 강요하는 공공을 개인의 쾌락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여기는 ‘공공의 적’, 폭력배만 들끓는 무정부적 사회로 모습이 바뀌어 지고 있다. 그래서 전체이기 보다 개인을, 그러한 개인들이 다시 끼리끼리 모여 그 속에 은둔하려 하는 ‘집단쾌락’이 ‘XX파’, ‘OO회’를 양산해 내고

에피쿠로스가 주창한 철학을 은둔주의 철학, 쾌락의 철학이라 일컫고 있으나 그들은 마지막에 ‘진정한 쾌락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삶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삶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며 그 삶의 온전함과 탁월함은 전체가 아닌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되고 검증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자신이 주인인 개인의 적극적인 삶이라고 하고

방종한 성생활이 오히려 해가 된다면 그것은 절제돼야 할 욕망인가 충족돼야 할 욕망인가. 충족이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인 욕망은 비본래적인 것으로 사회문화적으로 규정 내지는 강제되는 개인적 혹은 집단적 망상일 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충족돼야 할 진정한 쾌락은 ‘이성적이고 정의롭게 사는 삶 속에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사회의 폭력성은 본래적인 것 즉 충족돼

미국 유타주에 하루 20분씩 모여 편한 자세로 명상을 꾸준히 해 심혈관 질환 67%를 고쳤다는 그룹이 있다고 한다. 또 미국의 한 중학교에서는 전체학생을 같은 방법으로 명상하도록 해 학교폭력을 대폭 줄였다는 보고도 있다. 폭력이 쾌감에서 오고 쾌락의 근원이 개인주의에 있다면 자신과 우리, 개인과 전체의 관계속에서 충족돼야 할 진정한 쾌락과 자신과는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를 그려보게 하는 명상법

20세기 인류사적 사건은 명상을 우선시하는 불교의 서양전래라는 것도 음미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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