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 보고 듣고 느낀대로

목포 가는 연락선은 파도가 높아 몹시 흔들렸고 산지항을 나서자 멀미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12시간의 지루한 항해 끝에 목포에 도착하여 부둣가 국밥집에서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먹으니 추위에 떨던 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새벽 열차를 놓치면 저녁때까지 기다려 야간열차를 타야 하므로 국밥집에선 한잠 눈 붙이고 가라고 만류함에도 서울 가는 새벽 열차를 타기 위해 목포역에 나가 시간을 기다리는데 겨울철 새벽공기는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서울 서대문 평동에 있는 홍성철 형 댁에 여장을 풀고 서울대에 지원서를 제출한 나는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최종 점검하며 입시 날을 기다렸다. 홍성철 어머니는 입시가 있는 날 아침 일찍 정성껏 조반을 차려주고 성공을 기원해주셨다.

서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신설동역에서 내려 종암동에 있는 서울상대까지 30여분 걸어서 갔는데도 그래도 시간 여유가 있어 교실 뒤쪽에 가서 국어 고어 문제지를 점검하고 입시장에 들어갔다.

첫 시간이 국어시험 이었고 문제지는 세장으로 책상위에 엎어 놓았다. 시험 시작벨이 울리고 나는 문제지 세장을 한꺼번에 뒤집지 않고 맨 위장만을 뒤집어 이름과 번호를 쓰다 말고 깜짝 놀랐다. 입시장에 들어오기 직전 교실 뒤에서 마지막 점검한 고어 문제가 고스란히 세 문제나 출제되어 있었다.

용기를 얻은 나는 막힘없이 답을 써나갔고 이에 가속이 붙어 현대문까지도 잘 풀려 나갔다. 오직 하나 국어문제에서 한글로 제시한 단어를 한자로 쓰라는 1점짜리 문제 중 ‘질서(秩序)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늘 쓰던 글인데도 제대로 생각이 안나 애를 먹다가 시간은 다 돼가고 할 수 없이 ’秋序‘라 쓰고 나와 아쉬움만 남았다.

첫 시간이 끝나고 교정에 나왔더니 K친구의 누이가 울고 있어 연유를 물어보니 “우리 오빠 시험장은 종암국민학교인 것을 몰라 여기 왔다가 시간을 놓쳐 시험을 못 봤수게.” 하는 것이었다.

지원생이 많으니까 걸어서 20분 거리인 종암국민학교를 빌어 두 군데서 입시를 보는데 K친구는 어제 예비소집에 나오지 않아 자기가 들어갈 교실을 확인하지 못했던 탓이다. 이러한 와중에 옆에 서 있던 한 친구가 ‘제주에서 와수과? 혹시 현임종씨 아니우꽈?“ 하고 말을 걸어왔다.

그는 ”나는 제주도 오드승(오등리)이 고향이우다. 광주에서 살았는데 제주에 갔을 때 우리 고모가 김길남의 어머니여서 고모댁에서 본 일 있수다.“ 하고 말했고 옆에 섰던 아주머니도 ”느가 임종이가? 말 많이 들언 알암쪄. 시험 잘 보라이. 누구 따라오지 못했주이? 점심때랑 우리영 같이 강 점심 먹게 잉.“ 하고 친절히 대해 주셨다. 이렇게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지원한 정윤형 친구를 알게 되었다.

이어지는 영어, 수학 등에서도 행운이 따랐다. 일본 전국 대학 입시 문제집 3년치를 설파한 나는 영어와 수학에서도 전년도 일본 어느 대학에서 출제됐던 문제가 하나씩 나와 득을 보았다.

시험을 보고 난 다음 내 마음이 작년과 달리 상쾌해 ‘이번은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이 붙었지만 남에게 드러내 놓지는 못하고 합격자 발표 날을 기다렸는데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끼어있음을 보는 순간 기쁨보다는 입학금 마련 걱정이 앞섰다.

여비도 없어 고향에 다녀갈 수 없는 나는 입학금 마련 걱정으로 서울거리를 동분서주하고 있었는데 박병돈 부모님이 등록금을 보내주셨다. 평소에도 나를 친자식처럼 대해주셨지만 대학 입학금까지 보내줄 것으로는 생각지 못했는데 정말로 고마우신 분이고 영원히 잊지 못할 분이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셨던 김종철 선생님은 지방신문 편집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나의 합격 소식을 듣고 ‘형설의 공’이라는 타이틀로 박스기사를 써주셨다. 이 기사를 읽은 제주시내 유지들께서 조금씩 축하의 부조금을 보내주어 나의 학업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런 은인들의 도움에 보답하는 길은 내가 커서 이들처럼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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