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원주민들의 도래와 탐라의 대외관계

제주도의 원주민의 도래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 간에 주장이 대립되고 있어 아직도 정설은 없다.

제주도의 문화기반을 생각할 때 고대의 도래족(渡來族)은 약간의 표착족을 포함한 유만족(流亡族)으로 보고 있다. 그때만 해도 화산활동이 완전히 멎을 때가 아니었으며 또 농업에 적합한 토지 조건도 아니었다. 따라서 씨족연합사회 이후에 볼 수 있는 집단 이동이나 문화이동으로 보기보다는 사연을 지닌 종족들의 피난이나 유망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들은 한반도를 거쳐 온 한족(韓族)을 비롯하여 남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로 흘러들어 왔다고 생각된다. 특히 서복(徐福)집단이 일부를 포함 진한(秦漢)시대부터 볼 수 있는 중국의 망명인들 가운데 일부도 제주도에 도래한 채 그대로 잔류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들 선착 족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주류를 이룬 것은 근세에 이르러 대거 도래한 한족이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뒤늦게 이동을 해오면서 제주문화는 이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다고 하겠다.

탐라국(耽羅國)의 개국은 이들 유망 족 가운데 강력한 세력을 지닌 집단에 의하여 이룩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 세력가운데 씨족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고․양․부(高․梁․夫) 세 씨족집단 이었다고 생각된다.

개벽설화가 시사하고 있듯이 처음에는 고․양․부 세 씨족 연합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 가운데서도 차츰 강력해진 씨족 중심으로 지배체제가 정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그 개국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문제다. 그 기간이 오랜 것은 단군(檀君)의 고조선 건국 이전부터 늦은 것은 통일신라 때까지로 벌어지는 너무나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 진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기원 1세기를 전후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의 여러 사서들을 놓고 보아도 국호는 통일돼 있지 않지만 탐라를 가리키는 기록들이 이미 5세기 이전부터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는 「도이」(島夷) 「주호」(州胡) 등과 같은 기록들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탐라는 대체로 기원을 전후한

택리지(擇里志)의 기원 65년 설 등 여러 학자들의 주장도 한(漢)시대의 기원설이 많지만 대체로 이 시기의 견해가 비교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탐라의 개국은 우리나라에서 백제․신라․고구려가 일어나던 삼국의 건국시기와 거의 때를 같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5세기 이후 탐라에 관한 여러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최초의 것은 탐라국이 문주왕(文周王) 2년(476)에 백제(百濟)에 방물(方物)을 바쳤다는 기록으로 시작되고 있다. 동성왕(東城王) 20년(498)에는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아 백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므로 탐라가 사절을 보내 사과했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 (文武王) 19년(679)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 탐라는 왕권을 확립하여 독립국으로 존재하기는 했으나 백제가 강했을 때는 백제에, 신라가 강했을 때는 신라에 조공을 바쳤던 사실을 알 수 있고 항상 그들의 간섭을 받고 처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일본이나 중국의 사서를 종합해 보면 대체로 탐라는 476년부터 660년까지는 백제에 복사하였으며 661년부터 935년까지는 신라에 조공을 바치거나 사절을 보내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도 교역이 있었던 사실을 엿 볼 수 있다.

기록을 토대로 추적해 보면 탐라국은 선백제(先百濟) 후신라(後新羅)의 종속관계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938년(太祖 21)에 가서 고려(高麗)에 복사(服事)하게 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했던 기록도 여러 사서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탐라에 관한 많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는 661년 탐라의 왕자 아파기(阿波伎)가 일본에 들어가 공물을 바친 것을 비롯하여 서로 사절을 보내거나 방물을 주고받는 등 빈번한 교섭이 있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어 일본과 탐라는 고대부터 깊은 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