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뉴스제주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뉴스제주

지난한 항해와 달리, 전투로 변할 때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김통정의 호령이면 군함에 모인 자들이 모두 전투태세로 바뀌었다. 분명 우리 눈앞엔 결코 적지 않은, 어쩌면 뿌옇게 서린 안개너머로 더 많을지도 모를 상대편 군함이 미리 진을 치고 있었다.

하필 내가 탄 군함이 가장 앞서서 저들에게 돌진하였는데, 맞은편에서도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금세 불기운을 품은 화살이 안개 속을 뚫고 날아들기 시작했고, 간간히 굵은 창도 만만찮은 기세로 날아들었다. 분명 삼별초 군사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으나, 멈출 기미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나아갔고, 맞은편에서 화살이 잠시 잦아들자 이젠 여기서 똑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난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몸을 웅크렸다. 재빠르게 활시위를 당기는 삼별초 군사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온몸을 뒤덮는 안개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히려 앞뒤, 양옆으로 일정한 간격에 맞춰 올곧게 자세를 잡았다. 배는 양쪽으로 심각하게 흔들렸지만 이들에겐 전혀 어떠한 영향을 주지 않았다. 김통정의 호령과 함께 화살은 하늘로 치솟았다. 뒤따르던 군함에서도 곧바로 화살이 올라왔고 자욱한 안개마저도 뒤덮더니, 금세 상대편 군함에 내리꽂혔다. 안개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고, 처음엔 하나였다가 둘, 셋 그리고 열…….

다음 화살을 쏟아낼 때까지 상대편 군함들에서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쪽에서 돌아오는 화살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그만큼 삼별초 군함은 더 세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또 한 번 화살을 쏘아 올리자, 이젠 사람이 아니라 상대편 군함에서 굉음을 일으켰다. 뿌연 안개 속에서도 벌겋게 치솟는 불길이 모습을 드러냈고 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쾅,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물결이 몰아치는 바다로 쏟아지듯 떨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고, 그 위로 삼별초 군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진 또 전진하였다.  

그것도 잠시, 당장 앞을 가로막는 배들은 없었으나, 양옆으로 갑작스럽게 붙은 배들이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굉음과 불길이 치솟았던 배들 중 하나였다. 갑판 위로 쓰러진 고려군사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갑판 아래에서 더 많은 고려 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창과 화살이 날아들면서, 내가 있는 군함으로 고려군들이 하나둘씩 뛰어들고 있었다. 분명한 건, 삼별초 군사들도 이건 예측 못한 눈치였다. 궁수들은 급히 안쪽으로 물리고 창을 든 보병이 전면에 나섰다. 

“저놈이 바로 적장이다!”

고려군 장수가 바로 내 쪽을 가리켰다. 바로 뒤편에는 김통정이 자신에게 날아든 창과 화살을 걷어내고 있었다. 삼별초의 창은 화살처럼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금세 방어선이 무너졌고, 갑판 곳곳에서 백병전이 일어났다. 전력만큼 확연히 삼별초 군사들이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쓰러지는 군사들이 결코 적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양옆에 바짝 붙은 군함에서 새로이 군사들이 더 나오고 있었다. 또 다른 고려군의 군함이 바로 앞을 막으려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뒤쪽은 삼별초 군함이 바짝 붙어서 달려드는 고려군과 맞붙고, 화살로 엄호도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바람까지도 반대로 불기 시작했다. 김통정은 전투를 치르면서 계속 전진하라고 호령했으나, 아래에서 아무리 힘을 줘도 군함은 좀처럼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고려군은 갑판 아래까지도 내려간 터라, 군함의 방향도 점점 삐뚤어지고 있었다. 

“배가 부서지더라도 밀어 붙여라, 무조건 육지까지는 가야 한다!”

김통정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에 가득한 시뻘건 피를 닦아내더니, 구석에 웅크린 내게 고갯짓하였다. 빈손으로 손사래하는 내게,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칼을 던져주었다. 그리고는 저 너머에서 도끼로 삼별초 군사들과 상대 중인 고려군 부장 쪽을 쳐다보았다. 일단 최대한 시간만 벌어 보라는 말도 보태었다. 도대체 나더러 어찌 하란 말인가, 하는 수 없이 김통정의 눈총에 못 이겨 달려 나갔다. 바로 코앞으로 화살 몇 개가 아슬아슬하게 지나쳤고, 부장에게 다가갈 새도 없이 고려 군사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러나 이미 팔다리에서 피가 솟구쳤고, 목덜미도 심하게 긁힌 자국이 있었다. 그래도 두 손에 칼을 꽉 붙들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그의 칼끝은 내 머리카락도 건드리지 못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서 누가 도와준 건 아니었다, 스스로 쓰러지면서 나를 향한 두 눈을 끝내 감진 않았다.

그를 뛰어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눈앞에 삼별초 군사 다섯 명이 쓰러지는 걸 보고서야, 고려군 부장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말았다. 난 두 손으로 칼자루를 꽉 쥐었다. 내게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그에게 칼끝을 바짝 겨누었다. 얼굴부터 팔다리 온몸이 피로 범벅된 그는, 자신이 쓰러뜨린 삼별초 군사들을 걷어차는 여유까지 보였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도끼날을 내 칼에 갖다 붙였다.

“소문만 무성했던가, 어째 하나 같이 비실비실한 놈들만 오는 겐가!”

몸집이 나보다 두어 배 정도는 컸고, 목소리 하나만큼은 충분히 손끝이 떨리게끔 위협적이었다. 그 앞에서 쉬이 칼을 움직일 수 없었다. 두 다리를 벌리고 석상처럼 그를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돌아오는 건, 그의 큰 웃음이었다.

“네놈은 졸개만도 못 한 녀석 아니더냐? 칼은 제대로 잡을 줄은 알고?”

대놓고 비웃음을 섞은 질문이었다. 분명 뒷목이 뻐근해지고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으나 양손에다가 다리까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탐라에서 받았던 살기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눈앞에 있던 저 도끼라면 내 목은 충분히 날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삼별초가 아닌 최소한 내겐 아군이어야 할 고려군의 손에 이럴 순 없을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여기서 특별한 방도가 떠오르진 않았다. 그러기엔 여전히 머리 위로 날아드는 화살에다가 쓰러져가는 군사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잠깐, 낯이 익은데?”

도끼날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한 발자국 다가오면서 내 얼굴을 살펴보더니 갑자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 사이 도끼는 바닥을 찍어 내렸다. 그렇다고 당장 그를 향해 칼을 찔러 넣을 용기는 없었다. 그대로 가만히 서 있는 채, 그를 살펴보았다. 두 눈이 흔들렸고, 식은땀이 흐르는 걸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어찌 여기 계시는 겝니까?”

나를 알고 있었다. 처음엔 다른 이와 착각한 줄 알았으나, 장인어른을 언급하면서 탐라까지 내려갔던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탐라에 내려온 건 장인어른과 나만이 아는 대외비였다. 어찌 장인어른을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정확하게는 얘기하지 않았으나 분명 가까운 사이라는 건 눈치 챌 수 있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차마 꺼낼 수 없었고, 삼별초는 개경까지도 생각한다는 말만 넌지시 작은 목소리로 내밀었다. 사방이 정신없고 시끄러웠지만 그는 얘기를 알아들은 눈치였다. 몇 발자국 더 물러나더니, 내 뒤편을 눈짓으로 살펴보는 게 아니던가? 갑자기 퇴각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갑판 곳곳에서 격렬한 난전을 벌이던 고려 군사들은 하나둘씩 물러났고, 삼별초 군사들도 무리해서 따라붙진 않았다. 김통정도 역시 고려군이 자신들의 군함으로 돌아갈 때까지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고, 스스로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양옆에 바짝 붙었던 고려 군함도 서서히 물러나더니, 아예 길을 내줄 정도였다. 화살을 좀 더 날리던 삼별초도 어떠한 공격도 없이 물러나기만 하는 고려 군함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였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고려 군함도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바로 눈앞에는 작은 포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집들이 여러 채 보였는데 외관은 멀쩡한 상태였다. 포구에 삼별초 배들이 하나둘 정박하기 시작했다. 긴 항해와 격렬한 전투의 흔적은 군함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중 한 척은 뱃머리가 반파되었고 돛은 검게 그을린 자국이 아주 컸다. 그에 비해 내가 있는 군함은 군사들의 피해가 제법 큰 걸 빼면 양호한 편이었다. 

군함이 완전히 정박하자마자 군사들이 포구로 내려왔다. 김통정은 군사들을 한데 모아 그 앞에 서더니 나를 불러냈다. 그러면서 칼을 자신의 머리 위로 들었다.

“이자는, 첫 전투에서 지대한 공을 세웠다. 기습전에 우리의 피해가 더 크게 일어날 뻔했으나, 뛰어난 지략을 앞세워 적들이 스스로 물러나게 했다. 전투는 역시 천 개의 창보다 한마디 말이 무섭다는 걸, 일깨워줬느니라!”

김통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군사들은 나를 향해 두 손 번쩍 들고 환호하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괜스레 난 목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김통정, 도대체 내게 무슨 생각을 품었단 말이냐? (계속)  

소설가 차영민. ⓒ뉴스제주
소설가 차영민. ⓒ뉴스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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