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렸다고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이 땅은 잠시 저들의 짓밟혔지만,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처럼 다시금 솟아난다. 비록 꽃이 되지 못 하더라도 뿌리채 뽑히지 않을 저들의 움직임이 하나둘 피어올랐다.“갈 곳은 없다. 가야만 한다.”김통정이 사람들 앞에 섰다. 바람은 그의 곁을 맴돌며 주변의 쓰러진 꽃부터 일으켜 세웠다. 나도 그의 앞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섰다. 양옆에는 같은 바람에 일어난 사람들이 그가 그랬듯 온전히 몸을 내맡겼다. 이윽고 바람이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바로 그곳이었다. 성, 우리가 직접 쌓아올리고 도망치듯
그것은 마치 굶주린 맹수의 절규에 가까운 포효였다. 단지 허공에 맴돌다 낙엽처럼 바스라지는 무력함은 아니었다. 김통정의 찢어질 듯 뜨거운 목소리는 주변을 에워싸는 찬공기를 되차게 걷어냈다. 그의 움직임 한 번에 고려군은 하나둘 쓰러졌다. 단단하게 무장한 갑옷도 예리하게 날을 세운 창도 그를 막아낼 수 없었다. 오히려 달려들수록 더 빠르게 쓰러질 뿐이었다.“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그에게 달려든 고려군 선봉은 모두 높이 자란 풀들 사이로 쓰러져 일어나질 못 했다. 함께 따라온 나머지 군사들도 서로 눈치를 살필 뿐 선뜻 나서지 않
이 순간, 분명히 올 것이라고 나나 김통정이나 모두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또다시 반복된 추적 그리고 위협. 더 이상의 기회는 없으리라고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쯤되면 나 역시도 모든 걸 내려놓고 우리의 운명을 저들에게 맡겨야 함도 직감했다. “곧 저들이 오겠군.”김통정의 목소리에 힘이 한껏 빠져 있었다. 화살이 박힌 채 돌아온 자는 잔뜩 충혈된 눈으로 입을 크게 벌렸지만, 거기서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손을 김통정에게 내뻗은 채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은 하늘이 정해두었는지 모를 일이다. 거기서 한낱 한 사람이 그 뜻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탐라에 있는 시일이 기약 없이 늘어날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이 시간들이 과연 후대에 어떠한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머릿속의 기억들은 얼마나 온전히 그대로 남길 수 있을까, 의문스러움은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바꿀 수 없을지는 몰라도 방향은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결과는 정해져 있을 지라도 과정이 달라지면 어쩌면 결과 이후 새로운 시작은 하늘에서 선택권을 줄 지도 모를 일이다. 난 누구도 믿지
김통정 앞에 모인 사람들의 환호는 뜨거웠다. 어떤 폭풍에서도 쓰러지지 않을 바위와도 같은 기개가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모습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소리를 내지르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자도 있었다는 것. 나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한숨을 감추지 않는 노인 곁으로 다가갔다. 어째서 어깨가 축 처졌느냐고 물어보았다.“이제 편히 살아보나 했는데.”속삭이듯 내뱉는 그의 목소리와 함께 날이 선 눈빛은 김통정에게도 향하였다. 얼른 그의 가로막았다. 하마터면 김통정이 발견할 뻔했으나 계속 이
차가운 시선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김통정은 다시 손을 내밀었고, 양옆으로 한 사람씩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은 좀처럼 들어가질 않아, 휘청거렸으나 양팔을 붙든 이들이 견고하여 다시 주저앉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려 김통정과 함께 서 있는 자들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옷차림새는 여느 탐라 백성들과 큰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군데군데 해진 것이 걸치지 않는 것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저들의 손과 허리춤에 자리 잡은 무기들은 스치는 바람을 베어낼 듯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드디어 우린 함께 살 수 있을 걸세.”김통정
눈앞의 형체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달빛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였던 것들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의 얼굴로 변하였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초점이 완전히 사라진 저들의 눈빛을.“아무래도 발길을 돌려야겠네.”김통정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지만, 정작 우리가 돌릴 수 있는 발길은 없었다. 지나왔던 입구는 쓰러진 나무로 막혔고, 눈앞엔 저들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고, 양옆엔 형체가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 어둠 그 자체였다. 저들은 천천히 다가왔다. 김통정과 나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고 이내 양옆으로 각자 몸을 내던졌다.
너무나도 차가웠다, 이곳이 공기가 아닌 나를 향한 눈빛들이. 손끝부터 냉기가 깊게 서렸다. 반면 이마는 뜨거워지더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아니, 저놈은!”수많은 눈빛들 사이에 날카롭게 내 귓가에 다가온 목소리, 분명 처음은 아니었다. 성큼성큼 발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등장한 건, 바로 김통정과 가장 가까이했던 부장이었다. 삼별초와 함께 움직였을 때 직접 챙겼던 자이기도 했다. “어째서 여기까지 온 것인가!”그의 입김은 뜨거웠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대로 침묵을 지킬 수만 없을 터. 여기까지 온 연
다시 탐라로 돌아왔다. 완전히 떠난 바 없었으니, 땅에서 발만 뗀 셈이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나를 데리러 온 자들은 어쨌든 그냥은 돌아갈 수 없다고 단언했다. 내 의지대로 왔으니, 다시 돌아갈 상황이 되면 그들의 뜻을 따르자는 조건이 붙었다.“바람이 참 맑구려.”나를 데려온 자가 옆으로 다가왔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온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그래서 우린 무엇을 해야 하오?”마땅히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탐라를 떠나면 안 된다는 목소리만이
배가 멈추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다시 말해보시오. 배를 돌리라고?”주변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모였다. 거구의 사내 하나가 뒤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대뜸 내 목덜미를 잡는 게 아니던가. 다른 사람들이 그의 팔을 잡아당겨도 소용이 없었다. 목은 한껏 조여왔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네놈 때문에!”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목을 조이던 손에도 힘이 서서히 풀렸다. 당장 완전히 덮칠 것만 같던 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단순히 배를 돌릴 문제는 아닐세.”나를 데려온 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어깨에
몸을 다시 일으켰다. 땅은 계속 내 발을 붙잡았다. 아마 느꼈을 것이다. 발을 떼는 순간, 내 목숨줄이 더 빠르게 끊어질 것이라고. 그러나 멈출 순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이 땅은 수 많은 백성들의 목숨이 끊어질 것이 분명했다. 어디든, 누구든 상관없다. 보고 듣는 대로 무엇이든 담아내야만 한다. 축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걷는 동안 목은 계속 말랐다. 땅에 고인 물들은 보이는대로 마셨다. 그러나 좀처럼 타들어가는 목을 달랠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걷다가 보이는 풀들도 일단 한주먹씩 뜯어먹기도 했다. 빠져나
땅이 진동하였다. 비단 이곳을 장악한 고려군의 발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방경 앞에 쓰러진 고려군사가 외친 것처럼, 성 밖으로 거대한 함성이 울려퍼졌다. 순간, 고려군은 각자 자리에서 석상이 된 듯 멈추었다. 새파란 하늘을 세찬 비와 같은 화살이 드리우자 그제야 허둥지둥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기습이다, 기습!”쏟아지는 화살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고려군은 하나둘씩, 몸을 피하려다가 쓰러지기 일쑤였다. 김방경조차도 아슬아슬하게 화살을 걷어내며 주변 군사들부터 살펴보았다. 각자 몸을 피할 곳을 찾고 있었으나 이들이 지른 불 때문
창은 정확히 성벽에 내리꽂혔다. 그것도 홍다구 바로 아래에. 몽골군들이 갑자기 성벽에 쏟아지듯 올라섰고, 홍다구는 그 뒤로 슬쩍 몸을 숨기고 말았다. 고려군은 김방경의 호령 아래 성문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성문을 돌파하라!”김방경이 손짓하자 고려군은 마치 자신이 바윗덩어리라도 된 듯 번개처럼 성문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절대 꿈쩍하지도 않을 것만 같았던 성문이 흔들리는 것을. 어떠한 기구도 없이 오로지 군사들의 몸으로만 해낸 것이었다. 성벽 위에서는 화살과 돌, 창들이 비처럼 쏟아졌
땅이 울렸다. 김방경은 말고삐를 꽉 붙잡았고, 난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날이 선 바람이 얼굴을 스치웠지만. 그건 이곳에 있는 누구도 상관치 않았다. 지금은 그저 돌아가야만 했다. 목이 타들어 가고, 가슴이 조여왔다.까마귀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찢을 때쯤, 저 멀리 성이 보였다.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허공에서 날갯짓과 함께 울부짖고 있었다.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땐, 몽골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려군이 주변에 심은 나무처럼 자리를 꼿꼿하게 지키고 있었을 뿐.“당장 성으로 들어가야 한다!”김방경이 군
말은 빠르게 내달렸다. 고삐를 꽉 쥔, 고려군 부장의 허리에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김방경과 수하들 몇몇도 바로 옆에 따라붙었다. 성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성문 앞에 불길은 치솟았지만 군사들이 그곳을 넘지 못하였다.어둠 속으로 빠르게 접어들면서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었다. 단순히 우리 머리 위를 뒤덮은 나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에서 다가오는 바람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혀끝은 갈라질 듯 바짝 말라 있었다. 이미 양쪽 다리는 허공에서 힘없이 말 옆구리만 두드려댈 뿐이었다. 한참을 내달렸지만 변한
바람이 바뀌었다. 언뜻 느끼기엔 조금 전과 차이는 없을 수도 있겠으나, 분명한 건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만큼은 아니었다. 성벽을 등에 지고 우리 쪽으로 향하는 제법 무거운 바람이었다. “때가 되었다.”김방경이 칼을 빼들었다. 곧바로 진군을 명하였다. 그와 동시에 성벽 위로 삼별초 군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적지 않은 수였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사방으로 포진해 있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김방경은 눈 한 번 끔뻑이지 않았다. 고려군의 움직임에 소란스러워진 건, 몽골군 진영이었다. 그쪽에서 군사 하나가 말을
바람은 멈추었다, 방금 지나친 화살과 함께. 허나, 또 다른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우리 쪽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군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몽골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날아든 것인지, 알 수 없을 화살이 빠르게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제법 예리하여, 그저 허투루 지나친 것이 없었다. 한 발에 한 사람, 우리를 손바닥을 두고 꿰보듯 정확하기까지 하였다. 일단 난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기었다. 그러나 이미 이쪽으로도 쓰러진 군사들이 서넛은 되었다. 별 수 없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이
칼은 흔들렸지만 김방경의 눈빛은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오히려 얼굴과 눈,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건 홍다구였다. 칼을 쥔 팔목에는 핏대가 터질 듯 튀어나왔다. 이대로 칼이 김방경의 목으로 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그러나 누구도 선뜻 각자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고려군은 온몸이 묶이긴 했으나 저항할 기세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눈만 질끈 감고 있었다. 고려군 중에서 온전히 김방경을 살펴보는 건 내가 유일했다. 점점 메말라가는 입술을 혀끝으로 조금씩 축이며 일단 지켜보고 있었다.“모든 건, 네놈이 자초한 일이니
불을 지폈다, 삼별초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유일한 성문에. 누가 봐도 무모한 행동이었다. 직접 명을 내린 김방경도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지금으로선 딱히 다른 방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몽골군이 원하는 대로 계속 병력을 투입했다가는 성문은커녕 고려군 전체가 무너지리라는 판단이 있었다. 우회로 진입하는 방안도 검토해보았으나, 이곳은 요새였다. 지형 자체가 다른 곳으로는 쉽사리 진입할 수 없었고. 특히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삼별초는 이쪽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삼별초의 내부는 살펴볼 수 없었다.고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흙과 핏기로 시커메진 얼굴과 달리 눈망울이 맑았다. 마치 깊은 호수에 빠져든 것처럼. 잠시 멍하게 하는 사람을 멍하게 하는 기운이 서려있었다. 그 눈이 점점 붉어지더니 눈물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깊고 맑았던 눈망울은 어느덧 뿌옇게 번지고 말았다.“죽입써.”아이가 내 팔을 붙들었다. 아니, 살려고 여기까지 들어온 게 아니었던가? 어찌 저 어린것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건지.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김방경이 눈짓과 함께 조용히 바깥으로 물러났다. 마침 내 옆에는 김방경이 슬쩍 내려놓은 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