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문이 닫혔다. 조금 전까지 샅샅이 살펴봤던 바로 궁에서 말이다. 우린 서로 얼굴을 살펴보았다. 분명 궁에서는 누구의 발자국도, 인기척조차 최소한 우리 곁을 조금도 스치진 않았다. 주변 공기가 점점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 막아선 노인들의 그림자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라. 목숨은 살려줄 터이니.”

그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궁에 들어가기 전, 봤던 자들 중 한 명은 아니었다. 반쯤 깨진 투구에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구멍난 갑옷, 어깨에는 줄이 축 늘어진 활이 겨우 걸려 있었다. 오른손에는 날이 바짝 선 칼을 쥐긴 했으나 조금씩 흔들림이 보였다. 

그러나 그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눈빛은 아주 생기가 돌았다. 몸짓 하나, 말 한마디에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 할 정도였다. 우리를 향한 그의 칼끝에는 나머지 사람들의 눈빛도 함께였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땅에 무릎을 붙일 기미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각자 무기를 꺼내들었고, 나 역시 궁에서 주운 짧은 창을 들이밀었다. 

“무모한 짓 말고, 얼른 무릎 꿇고 빌라니까!”

하늘로 치솟는 그의 목소리와 달리 오른발은 어느새 뒤로 물러나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흙먼지는 어느새 그들을 충분히 뒤덮고도 남았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건, 기침 소리였다. 어느새 모여있는 모두 같은 증상을 보이더니, 몇몇은 알아서 바닥에 주저앉거나 엎드리기까지 했다.

“마지막이다, 어서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하거라!” 

그가 다시 앞으로 다가오면서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게 전부였다. 얼굴에 흙먼지가 달라붙더니, 눈을 비비면서 슬쩍슬쩍 물러나기 시작했다. 무리에 들어가더니 아주 큰 기침과 함께 흔적조차 아예 감춰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자, 오히려 그들은 알아서 길을 내어주는 게 아니던가? 분명 자신들이 쥔 무기로 위협하는 시늉은 보여줬으나, 말 그대로 아주 작은 몸짓에 불과했다. 오히려 움직일수록 그 주변까지 휘청거리는 모습에, 오히려 우리 쪽에서 조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분명 그들이 맡는 흙먼지가 우리를 피해한 건 아니었고, 코끝과 눈이 간지럽긴 했으나 딱 거기까지.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눈앞을 가리는 건 여전히 우물쭈물 어떻게 어디로 움직일지 모르는 노인들이었다. 뒤로 물러나면서 자신들끼리 부딪치고 넘어지고 심지어 밟기까지 궁에서 제법 벗어나 마을 한가운데까지 아주 느리게 걸어가는데. 여전히 따라붙는 저들의 모습에 움찔보다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어차피 이리된 거, 다 밀어버릴까나?”

우리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순간 빠르게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누굴 위해 일부러 피까지 본단 말인가. 오히려 저들에게 제대로 대화를 이어가자고 했으나, 그건 나머지 사람들이 손사래쳤다. 애초부터 얘기할 의지도 없으니,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라 입을 모았다. 그리하여 정말 성문까지 금방 당도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노인들의 행렬은 이어졌으나, 좀처럼 성문과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 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우리가 성문을 열려고 가자, 저들이 웅성거리면서 손짓하였다.

“그만, 그만! 저긴 아냐.”

다시 얼굴을 드러낸 그,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과 퍼렇게 꽃이 핀 얼굴까지. 목소리마저도 조금 전보다 축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성문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노인들이 무기를 내던지는 게 아니던가. 우리를 향한 게 아니라, 정확히 성문이었다. 어떻게든 저 문에 손을 대선 안 된다며. 갑작스럽게 우리쪽으로 몰려들기까지 했다. 
귓가에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파고 들었다. 별다른 일 없이, 그저 걷기만 했을 뿐인데 저들의 호흡은 이미 큰 전투를 수차례나 치른 군사들 그 이상이었다. 우리는 무기를 꽉 쥐고 가장 가까이 붙은 자들에게 겨누자, 바닥에 쇳소리가 부딪치기 시작했다. 우릴 둘러싼 그들은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더니 심지어 양팔을 위로 들기까지 했다. 

“부탁이니, 제발 저 문은 손대지 마시오.”

조금 전 우리에게 칼을 드리운 그 역시, 어깨에 걸쳤던 활까지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느새 성문 쪽으로 사람들이 진을 치는 게 아니던가? 성문을 앞에 두고 느닷없이 둘러싸인 모양새가 되었다. 마음대로 움직일 거면, 도대체 양팔은 왜 들고만 있는지…….
결국 우리도 무기를 완전히 거둬들였고, 자리도 성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다시 잡았다. 당장 무기를 들지 않았을 뿐, 저들과 처음 맞닥뜨렸을 때 묵직한 공기는 여전했다. 오히려 옆에 성문을 두니, 더욱더 공기가 무겁게 내리앉은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떨어질 즈음, 저쪽에서 몇 사람이 나왔다. 양손과 온몸 구석구석에는 어떤 무기나 또 다른 기구를 챙기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일단 살기는 내뿜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까지 선보였다. 

“우린 여기에 피바람이 불지 않길 바라오.”

저들의 조건은 딱 하나였다. 어떤 누구도 이 성에 들어오지 않는 것. 그것만이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을 살릴 유일한 방책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먼저 삼별초의 무혈입성은 어떤지 물었으나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은 특히 삼별초라면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우리 아들도 그놈들이 데려갔어.”

저들에겐 고려군도 삼별초도 그놈들이었다. 분명 각자 나라를 지키겠다 데려갔건만, 어느 날 갑자기 주검으로 돌아오거나 아예 흔적조차 사라지다니. 최소한 여기 살아남은 사람들은 각자 그런 사연들이 있었다. 그저 언제 돌아올지 모를 식구들의 소식을 혹시나 모를 희망에 얹어 버티는 중이었다. 그 희망에 우리의 존재는 일단 커다란 암초나 다름 없었을 뿐. 

그러나 김통정이 여기에 우릴 데려다놓은 건, 단순히 그냥 내버려둘 심산이 아닐게 분명했다. 오히려 우리를 통해 내부에 어떤 존재들이 있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중에서도 이런 정보를 확실히 알려준다면, 일단 잃어버렸던 신임을 다시 얻지 않을까, 하는 희망 아닌 희망도 품은 눈치였다. 

당장 문제는 성문을 절대 열어줄 수 없다는 저들의 입장이 확고했다. 지금 여기 남은 사람들로는 절대 성문과 성벽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은 맞았다. 오히려 직접 지키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삼별초가 섣불리 들어오지 못 했던 건 저들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여기서 계속 머무는 건, 저들도 원하지 않았다. 직접 밝힌 건, 아니지만 대략 얘기를 들어보면 당장 자신들도 먹을 식량도 부족할뿐더러, 이런 사실 자체를 최대한 숨기고 싶은 눈치였다.  

“만약 저놈들이 들어온다면, 당신들 탓이오.”

성 밖에 삼별초의 존재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성 밖에 주변을 서서히 장악하는 것부터 호시탐탐 어떻게 들어올지 기회만 엿보는 것까지. 그러나 우리를 왜 들여보냈는지 그 이유만큼은 저들도 의아한 눈치였다. 척후치곤 너무 부실하다면 반박할 얘기도 없었다.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먼저 제안했다. 오히려 성문을 더 활짝 열어달라고. 대신 누구도 여기 들어올 수 없도록 소문을 하나 저들에게 퍼뜨리는 조건까지 덧붙였다. 

“그 소문이 뭐요? 절대 저놈들이 여기에 발도 못 들이는, 그런 소문 말이오.”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얼굴과 목을 박박 긁기 시작했다. 일부러 바닥에 흙을 묻혔고, 함께 있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해보라 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흙도 입안에 머금다가 뱉어내기도 했다. 그러자 저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릴 따라하기 시작했다. 얼마 있다가 성문이 열렸다,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 직접 열었다. 문밖에는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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