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소설가의 역사장편소설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Newsjeju

앞만 보고 걸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굳게 닫힌 성문만 눈앞에 있었을 뿐. 과연 저곳을 지나갈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성문이 알아서 열렸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곳을 지키는 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굳게 닫힌 건 확실했다. 성 밖으로 나가는 순간, 주변 나무들이 흔들렸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인기척은 확실히 알아차렸다. 하지만 더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다만 성문 주변에 피비린내가 제법 진하게 풍겼을 뿐. 일단 성벽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검게 물들었다. 달빛마저도 완전히 가리워, 당장 눈앞에 뭐가 있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 발이 닿는 곳에 돌과 흙이 스치는 것과 점점 서늘해지는 등골을 벗 삼아 걷고 또 걸었다. 적막함이 내려앉아 새들의 울음이 더 크게 들려왔다. 어째, 저 새들의 소리가 새가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걸었다. 성은 완전히 어둠에 묻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오른편에 파도 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산으로 향하는 바람에 바닷물을 담아온 것일까, 얼굴이 점점 꺼칠꺼칠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걸어야만 하는 것일까?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지난밤, 그가 보여주었던 지도를 떠올려보았다. 내 기억에 큰 오류가 없다면, 이 근처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는 또 누가 있을지, 나를 맞이해줄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풀숲이 들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곳에서가 아니라, 양옆으로 불규칙했다. 눈을 크게 떴지만 딱히 뭐가 보이는 건 없었다. 대신 귀가 더 열려, 작은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확실했다, 지금 난 여기 혼자가 아니구나. 거기 누구 있냐고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사방에서 풀숲이 들썩거렸다. 심지어 머리 위에 나뭇가지도 함께 흔들거렸다. 이건 바람의 방향과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다가 갑자기 내달렸다. 양옆에서 같이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다시 멈추고 왔던 길로 몸을 돌리자마자 눈앞에 낯선 그림자가 턱 하니 가로막았다.

“그만 가시지요.”

속삭이듯 소리는 작았지만 낮고 굵었다. 무엇보다 내 팔을 붙잡은 손바닥이 짐승의 발처럼 두꺼웠다. 그에게 팔이 붙들린 채, 풀숲이 있는 곳으로 끌려가듯 따라갔다. 주변에 낯선 그림자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누가 누군지는 가는 내내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가는 길이, 보통 사람들은 다니지 않은 곳이란 정도만 알 수 있었을뿐. 가는 동안 팔다리에 풀과 돌들이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다. 아프다고 살살 좀 가자 했으나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내 팔을 붙잡은 손에 더 힘이 들어갔을 뿐. 억지로 손을 떼어내려고 할수록 괜히 내 팔만 더 조여들었다. 보폭도 어찌나 넓던지, 그가 한 발자국 내디디면 나는 두세 발자국은 빠르게 움직여만 했다. 

한참을 걷고 또 걷고서야, 저 멀리 불빛이 어스름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다 비린내는 온데간데없었고, 산새들의 지저귐이 더 크기만 했다. 머리 위로는 하늘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나무들이 무성하게 죽 늘어서 있었다. 걸음을 멈춘 건, 횃불 앞에서였다.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지만, 이들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풀어 해친 머리카락은 그렇다치더라도, 얼굴 곳곳에 이상한 것들이 솟아나 있었다. 죽은 나무에 피어난 버섯들처럼. 조금 더 살펴보니, 단순히 얼굴만이 아니라 내 팔을 붙잡은 손부터 시작해서 바깥으로 드러난 몸 구석구석이 검붉은 것들이 솟아났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 같았다. 몸집이 크고 작은 그것만 차이가 있었을뿐 좀처럼 나이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당신이오?”

횃불 곁을 지키던 남자가 다가왔다. 목소리만으로는 기력이 쇠하고, 말끝이 흐린 걸로 보아 나이가 있었다. 앞뒤 다 자르고 물어보니 딱히 대답할 게 없었다. 나를 찬찬히 살펴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도 그에 동조하듯 함께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주변에 다른 불빛은 없었다. 금세 우리는 어둠에 휘감겼고, 길이라고 할 것도 없는 길은 더욱더 온몸 구석구석을 긁어댔다. 어디로 가는지는 여전히 알려주지 않았고, 다시 멈춘 건 시냇물이 발끝을 적시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거의 마지막쯤이 되어서야 나도 거칠게 떠밀렸다. 큰 바위 아래 자그마한 구멍이었는데, 겨우 몸 하나 들어갈 정도였다. 그냥은 안 되고 까칠한 돌바닥에 바짝 엎드려야만 가능한 구멍. 다리부터 일단 집어넣었는데 허리쯤에서 뾰족한 것이 걸렸다. 다시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바깥에서 머리를 미는 터라 비명조차 내뱉지 못 하고 그냥 밀려들어갔다. 다시 한 번 어깨쯤에서 걸렸다가 또 머리가 밀리고, 결국 이마에 돌가루를 잔뜩 묻히고서야 완전히 구멍 안으로 들어왔다. 몇 사람이 겨우 설 수 있을 좁은 공간이었다. 여기서도 또 하나 구멍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나부터 먼저 들여보내는 게 아니던가?

“시간이 없소!”

멈칫하는 내게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 다시 또 다른 구멍으로 몸을 집어 넣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리 좁지는 않아서 금방 쑥 들어갈 수 있었으나, 제법 깊었다. 발은 붕 뜬 채, 낭떠러지에 빠진 듯 꽤 있다가 드디어 발바닥이 푹신한 걸 밟았다. 다시 몸을 일으키자마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불빛이 일어나는 게 아니던가. 그것도 대낮처럼 환하게. 

“이제야 뵙습니다. 오시는 길 힘들진 않으셨는지요?”

불빛 사이로 한 사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백발이었지만 얼굴은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사내였다. 얼굴에 주름은 있었고, 몸집은 나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었다. 내게 내민 손이 고와서 언뜻 여인네와 착각할 정도였다. 웃는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그저 낯설기만 할 뿐이었다. 

“일단 여기 잠깐 앉으시지요.”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횃불 너머로 물기로 가득한 돌이 있다는 것만 빼고는, 그저 어느 건물 속에 있는 공간 그 자체였다. 곳곳에 막사가 설치되어 있었고, 밥을 짓는 기구들에다가, 쌓아둔 식량에, 무엇보다 사람들이 있었다. 사내와 여인들 그리고 아이들까지도. 그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이 공간을 울렸지만. 분명 이곳은 또 하나의 마을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여기는 어디이며, 지금 내게 손을 내민 이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계속)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소설가 차영민. ©News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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