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김정환 기자 = 스릴러 ‘숨바꼭질’이 300만 관객을 눈 앞에 두고 있다. 14일 개봉해 열흘도 안 돼서다. 중고생의 여름방학이 끝나고 직장인의 여름휴가도 막바지이건만 흥행기세는 그대로다.

영화가 히트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허정(32) 감독을 2010년 엠넷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2’ 우승자인 가수 허각(28)에 빗대 ‘영화계의 허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두 사람이 종씨이고, 이름이 외자인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같은 날 개봉한 경쟁작인 장혁(37) 수애(33)의 재난 블록버스터 ‘감기’(감독 김성수)와 비교해 모든 면에서 열세인 허 감독의 ‘숨바꼭질’이 완승을 거둔 것이 ‘슈퍼스타K2’ 당시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배관공’으로 일하며 행사 가수로 뛰던 허각이 외모, 학벌, 집안, 노래실력 등 모든 것을 다 가진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재미동포 존 박(25)을 누르고 우승을 거머쥔 드라마틱한 성공스토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허 감독에게도 ‘숨바꼭질’ 탄생까지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있다.

대학 영문학과 2학년을 마치고 카투사로 군대를 다녀온 허 감독은 복학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어느 문화센터에서 영화를 배우게 된다. 당시만 해도 영화를 남들보다 조금 더 좋아할 정도의 복학생에 불과했던 허 감독은 그 곳에서 영화에 깊이 빠져든다. 결국 3학년 1학기 복학 대신 중퇴를 택한 뒤 다시 수능시험을 치르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학부(예술사)에 입학한다.

영상원에서 대학생활을 새로 시작한 허 감독은 단편영화를 찍기 위해 휴학하지만, 정작 자신의 단편영화는 만들지 못하고 친구들의 작업만 도와주며 1년을 보낸다. 결국 허 감독은 5년 만에 한예종을 졸업하게 된다. 대학 생활은 상당히 평범했던 셈이다.

그러나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졸업 작품으로 준비한 단편 ‘저주의 기간’으로 2010년 ‘제9회 미장센 단편영화제-장르의 상상력’전에서 ‘절대악몽’(공포스릴러)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따낸다. 2013년 여름 수백만명을 절대악몽에 빠뜨리고 있는 ‘허정식 공포스릴러’의 태동이다.


허 감독은 모교 대학원(전문사) 진학을 꿈꿨지만 포기해야 했다. 전문사 과정의 학비는 다른 대학원보다 저렴하지만 수많은 작품을 직접 만들어야 하는 워크숍 커리큘럼 때문에 경제적 부담이 컸던 탓이다. 허 감독은 나이 서른에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집에 손까지 벌리기 싫어 서울의 고시원에서 홀로 지내며 미장센 영화제에서 받은 상금이나 영화 현장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번 돈으로 생활했다. 그런 처지에 학비까지 감당하기는 힘에 부쳤다. 허 감독이 학비부터 작품 제작비까지 전액 국비 지원되는 영화진흥위원회 산하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 입교한 이유다.

가진 재주가 시나리오 쓰고, 영화 연출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 허 감독은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꿈을 실천해간다.

같은 해 판타지 멜로 시나리오로 CJ문화재단의 신인 스토리텔러 지원 프로그램인 ‘프로젝트 S’ 2기에 응모해 선정됐다. 지난해 12월 개봉해 183만 관객을 모은 변성현(33) 감독의 ‘나의 PS 파트너’, 올해 개봉해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호평을 들은 김성훈(39) 감독의 ‘마이 리틀 히어로’ 등이 1기에 뽑혀 영화화됐다. 하지만 허 감독의 작품은 영화로 옮겨지지 못했다.

지금은 “시나리오가 영화화되기에 부족했나 보죠”라며 웃지만 당시 허 감독은 마음고생이 상당했다. 다만 프로젝트에 선정된 덕에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돼 생활비 걱정은 덜 수 있었다.

허 감독은 2011년부터 새 시나리오 집필에 나선다. 우연히 방송에서 접한 남의 집에 숨어사는 낯선 사람들에 관한 괴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고 믿는 내 집이 사실은 가장 위험한 공간일 때 갖게 되는 공포가 정말 끔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년 동안 쓰고 고치고 다시 쓴 시나리오는 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난 영화 프로듀서에 의해 스튜디오 드림캡처 김미희(48) 대표에게 소개됐고, 신인 감독의 참신하고 독특한 시나리오에 매료된 김 대표가 나서 적극적으로 제작을 추진해 빛을 보게 됐다.


매료된 사람은 김 대표뿐 아니었다. 지난해 SBS TV 드라마 ‘추적자 더 체이서’의 주인공 ‘백홍석’으로 주가를 올린 손현주(48), 재난영화 ‘연가시’로 연기력을 재확인한 문정희(37), 안방극장 시청률의 여왕 전미선(43) 등도 앞다퉈 동참했다. 손현주와 전미선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스크린 복귀, 문정희는 마침내 생겨나기 시작한 티켓파워의 충전을 데뷔감독의 독특한 시나리오에 걸었다.

“출연진 중에 스타가 없어서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저는 선배님들의 오랜 팬이었고, 제게 그 분들은 스타였기 때문에 자신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그리는데 그분들만큼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출연진이 또 있을까요.”

초짜 감독, ‘스타’라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배우들, 2012년 외부 투자 외에 자체적으로 수억원을 쏟아부은 스포츠 휴먼 ‘페이스 메이커’가 참담히 실패하며 휘청했던 영화사, 자체 멀티플렉스 체인이 없는 배급사(NEW)가 뭉쳐 만든 ‘숨바꼭질’은 예상을 깨고 흥행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개봉일인 14일 1위 ‘감기’에 불과 1만2000명 뒤져 2위로 출발한 뒤, 15일에는 ‘감기’를 밀어내고 1위로 올라서 줄곧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개봉 5일째 되던 18일에는 손익분기점(140만명)을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8월 말까지 500만명을 넘길 것이라는 예상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천천히, 그것도 멀리 빙빙 돌아 이제 비로소 제 코스로 들어선 허 감독에게 ‘영화계의 허각’이라는 말은 어떨까. “에고, 민망하네요”라고 부끄러워 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가장 궁금했던 것, “허각이랑 친척인가.” 아니란다. “허씨가 외자 이름이 많아서 그렇게도 보이겠네요.” 그러고 보니 허정, 허각 외에도 조선시대 문신 허균(1569~1618), MC 허참(64), 농구황제 허재(48) 등도 있다.

그렇다면 허 감독은 ‘슈퍼스타K 2’에서 누구를 응원했을까. “장재인씨요. 목소리가 정말 좋아요. 장재인씨 떨어진 뒤에는 안 봤어요.” 장재인은 당시 톱3에 올라갔다가 결선 문턱에서 탈락했다. 허 감독은 국민적 관심사였던 허각의 결선을 안 본 것이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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