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요즘 세대 아이들의 공부방을 들여다 보면 정말 우리 나라도 많이 발전했구나 하고 느껴질 때가 많다.

각종 학습도구는 물론이고 책. 걸상도 현대화되어 조금도 불편함이 없게 되었으니, 내가 어렸을 적과 견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처음으로 공부하게 된 것은 외조부 밑에서 한문을 배울 때인데, 그 때 나의 필기도구란 고작 돼지털로 만든 붓 한 자루와 도마모양의 나무판대기 하나였다. 주로 천자문을 소리내어 외우면서 글을 익혔고, 글 쓰는 연습을 할 때는 종이가 귀한 시절이라 모든 학생들이 나무판대기에 물적신 붓으로 글씨를 쓰고, 걸레로 닦아 지우며 반복하였다.

한문서당을 그만두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빌렛학교』라는 명신서당에 입학했는데, 그 학교는 동네 어른들이 돈을 모아 세운 무언가 개량서당이었다.

학생은 남녀 100여 명 가량이지만 선생님 한 분이 1학년부터 6학년 과정까지 모두 가르쳤으니, 제대로 된 교육이 될 수 없었을 테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기가 가장 재미나게 공부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개량서당은 한문서당과 달리 초등학교 과정을 배우게 되므로 교과서는 물론 공책, 필기도구 들이 필요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모두 갖출 수는 없었다.

나는 일본에 계시는 외숙부가 보내준 공책과 연필을 갖고 다녔지만, 다른 친구들은 모두 마분지를 오려 만든 공책을 썼고 몽당연필을 사용했다.

학교다니게 되면서 부모님께서 마련해 주신 책상은 석유곽이었다. 석유곽이란, 석유를 수입할 때 석유깡통 2개를 집어넣고 포장했던 나무상자인데, 단단하고 네모반듯하여 어린 나에게 더없이 좋은 책상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4.3사건으로 집과 함께 불타버렸다. 마을을 재건한 뒤로는 사과궤짝을 구해다가 책상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석유곽과는 비교과 안될 정도로 부실하고 불편하여 짜증이 나곤 했다.

야간중학교에 다닐 때 신성여중 급사로 취직해서도 집에서는 여전히 사과궤짝 책상에서 공부를 했고, 야간고등학교때는 제주 미국공보원에 취직을 하여 직장 숙직실에서 살게 됨에 따라 사무실 책걸상을 사용하게 되었다.

드디어 사과궤짝 책상과 헤어지게 되었으니 너무나도 기뻤다. 세월이 흐른 후, 우리 아이들에게나 후배들에게 나의 사과궤짝 책상 얘기를 들려주었지만 아무도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건성으로 들어넘기는 걸로 봐서 나만의 추억으로나 간직해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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