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간 유령인물과 지명수배자로 몰려 미국, 호주, 필리핀 등 40여개국을 떠돌아 다녀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이름이 5차례나 바뀌고 생년월일, 주소, 본적, 출생지 등이 수시로 뒤바뀐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됐어요."

마이클 리(61)씨는 1966년 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해 북파공작원으로 45년간 국내와 해외를 떠돌아 다녔던 과거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 한켠이 저려온다.

그는 자신의 진짜 이름은 물론 태어난 곳과 날짜도, 부모의 얼굴도 잘 모른다. 다만 자신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고 부친이 자신을 데리고 부산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 전부다. 부친 역시 북파공작원으로 일했으며 1953년 특수임무를 위해 자신을 부산의 한 고아원에 위탁했고 같은 해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전사하면서 고아가 됐다.

마이클 리씨는 1954년 고아원 인근에 있던 비행장을 방문한 미군의 지프차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를 계기로 파일럿이었던 미군에 입양돼 비교적 평온한 유아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양아버지 역시 비행훈련 도중 사고로 사망하면서 다시 고아원 생활을 하게 됐다.

고아원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던 마이클 리씨는 1959년 고아원을 도망쳐 나왔고 조직폭력배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가 북파공작원으로 일하게 된 계기는 당시 16살이던 1966년 10월 부산 조직폭력배들 간에 미군 물자 밀수를 둘러싸고 2명이 사망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살인 사건에 연루돼 부산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가 살인 사건과 무관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리씨는 1967년 성인교도소인 안양교도소로 이감됐다. 그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카투사로 복무하면 교도소를 나갈 수 있다"는 말에 군 복무 요청을 받아들였고 수감된지 8개월 만인 같은해 6월 출소했다.

마이클 리씨는 "교도소에서 들었던 이야기와는 달리 출소한 이후 정보요원으로 분류돼 특수정보임무를 위한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며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연고자가 없는 어린 고아를 찾아내 정보를 조작한 후 정보요원으로 포섭하는 일을 했는데 영어도 잘하고 체격도 좋아 나를 지목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클 리씨는 이에 따라 1968년 8월부터 서해 해상지역을 주 작전지역으로 하는 북파 특수정보부대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68년 11월 38선 비무장지대(DMZ) 북방남방한계선에서 북파공작 특수임무첩보를 수행한 후 귀환하다 아군의 총에 맞아 산 아래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하반신까지 마비됐다. 결국 43년만인 올해 10월 서울 행정법원에서 특수임무첩보수행 중 총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최종 판결을 받아냈다. 이에 대한 변호는 양천합동법률사무소 김수경 변호사가 맡았다.

마이클 리씨는 "우리 정부는 당시 휴전선 인근에서 벌어진 총격전에 대해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라고 공표했다"며 "내가 총상을 입은 것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우리나라의 휴전협정 위반 사실이 밝혀질까봐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지하에서 일주일 이상 갇혀 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중상을 입은후 일주일 간 갇혀 지내다 치료를 받게 된 것도 미 정보국(CIA)이 문제를 삼았기 때문이었다.

마이클 리씨는 "다친 지 일주일 이상 지난 후에야 국군 야전병원 의무중대에서 겨우 4개월간 치료 받을 수 있었다"며 "그 사이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호적이 '임형기'에서 '이형기'로 조작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치료가 채 끝나기 전 특수부대에서 제외 돼 베트남 호이안과 사이공에서 군 생활을 하다 1971년 3월 제대했다. 제대를 했지만 중앙정보부는 여전히 그에게 정보요원을 하도록 강요했다. 심지어 감시를 위해 중앙정보부는 1972년과 1976년 유신헌법 프락치 사건 등 허위 사실을 내세워 지명수배까지 올렸다.

그 후 동남아와 유럽 등지를 떠돌다 귀국하다를 반복하다가 1979년 우연히 만난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딸을 낳았다.

마이클 리씨는 "아내가 딸을 낳았다는 사실도 임무수행 중 뒤늦게 알게 됐으나 처지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결국 아내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는 등 생이별을 해야했다"며 "가족과 함게 살기 위해 지명수배를 해제해 달라고 수차례 요구했지만 정권이 바뀐 다음에도 옛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워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심끝에 외국에서 아내와 함께 살기 위해 호주에서 난민으로 망명신청을 했다. 하지만 정부가 가짜로 올린 지명수배로 인해 호주 영주권을 박탈당하고 1993년 9월 한국으로 추방됐다.

마이클 리씨는 한국에 온 후 부터 호적정정신청을 하는 등 힘겨운 법정싸움을 시작했다. 지난해 8월 전과기록말소거부 취소 헌법소원을 제기해 38년 만인 같은해 11월 지명수배가 풀렸다.

마이클 리씨는 지난해 7월 "정부가 북파공작원 정체가 탄로날까 우려해 내 신분을 조작하고 전과기록과 지명수배까지 조작해 평생 인간답게 살 수 조차 없도록 만들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서울 중앙지방법원에 5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마이클 리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 대한 결심은 12월께 서울 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다.

마이클 리씨에 대한 변호는 법무법인 양재 김창국, 하경철, 최병모, 김현임, 김필성, 고현석, 민승현 변호사가 맡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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