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이었다. 분명 내가 이곳에서 흙과 돌을 나를 때까지만 해도, 황무지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어떤 생명도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적막한 공기만이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물론 성벽 주변엔 여전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제법 많은 사람들이 흙과 돌을 끌어안고 다리를 반쯤 강제로 끌고 다니다시피 했다. 성벽에서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빨갛게 칠해진 커다란 궁궐이 보였다. 웅장하다못해, 과연 이곳에 어찌 자리 잡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이질감도 은은하게 내뿜는 건물이었다. 주변 민가는 바닷가 쪽 민가와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였다. 다만 바
그들은 내 이름을 불렀다. 귀가 의심스러웠지만. 분명했다. 그림자로 드리워 얼굴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누군지는 알 것만도 같았다. 순간,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들의 부축에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다섯 남자의 얼굴이 명확하게 들어왔다.“살아있어서 다행이외다.”그중 한 사람은 구면이었다. 나와 직접 가깝게 지낸 건 아니고, 장인이 자주 불러서 술을 청하던 자였다. 도성을 지키는 일개 군관이었지만. 장인과 독대해서 만나는 일이 많았던 예사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 자가 바로 내 앞에 있다니. 눈을 의심하지 않
비명은 금방 사라졌다. 대신 발바닥을 심히 긁어대는 진동이 소리로 바뀌어 귀를 파고들었다. 방금 터져 나온 비명은 어느 순간, 미세한 신음으로 바뀌고 말았다.“이, 이게 무슨 일인가!”내 앞에 그는 소리쳤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전보다 더 큰 진동이 흙먼지와 함께 내 몸을 벽 쪽으로 밀어냈다. 눈앞에 당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바닥을 훑었으나 온통 흙과 까끌까끌한 돌멩이만 가득했다. 몸을 일으켰으나 정수리에 뭉툭하고 뾰족한 것이 닿았다. 허리를 반쯤 숙이고 반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것도 잠시,
손가락 끝에 찬 공기가 날카롭게 스쳤다. 단순히 햇볕 하나 스며들지 않은 공간이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지금 눈앞에 마주 보고 있는 백발의 사내 존재가 그랬다. 분명 입꼬리를 살포시 올린 채, 손을 내밀었다. 선뜻 그 손을 맞잡을 수 없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을뿐더러, 나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머리카락 끝에서 울리는 떨림이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얘긴 어렴풋하게 들었습니다.”그와 손을 잡았다. 정확히는 먼저 오른손이 붙들린 셈이다. 고목처럼 깡마른 손에서 나오는 힘은 여느 젊은 사내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어쩌
앞만 보고 걸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굳게 닫힌 성문만 눈앞에 있었을 뿐. 과연 저곳을 지나갈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성문이 알아서 열렸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곳을 지키는 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굳게 닫힌 건 확실했다. 성 밖으로 나가는 순간, 주변 나무들이 흔들렸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인기척은 확실히 알아차렸다. 하지만 더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다만 성문 주변에 피비린내가 제법 진하게 풍겼을 뿐. 일단 성벽과 점점 멀어지
새벽에 물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포구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엔 전날 밤,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삼별초 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 사람만 겨우 들어갈 법한 작은 나룻배가 물결을 따라 찬찬히 출렁였다.“오셨소?”달빛에 취한 줄 알았더니, 그는 저만치서 다가오는 내 그림자를 바로 알아차렸다. 옆에 다가가서 일단 조용히 서 있었다. 여전히 잔잔한 물결 앞에 침묵은 꽤 오래 이어졌다. 주변엔 우리 두 사람 말고는 누구도 스치지 않았고, 으스름한 달빛마저도 묘하게 비켜나가는 중이었다.어둠이 내리깔린 수평선 너머 미세하게 붉은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포위망을 점점 좁히던 삼별초 군사 몇몇은 이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무엇보다 방금 우리에게 소리친 삼별초 부장도 상태가 영 아니었다. 어깨를 관통한 칼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천천히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그 걸음이 다른 누구보다 묵직했다. 그리고 괜히 내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소.”그는 내 앞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깨에 박힌 칼은 옆으로 조금 더 비틀어진 상태였다. 숨이 멈춘 모습을 함께
눈앞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곳은 우리가 돌파해야 할 군영 한가운데서였다.괴성과 함께 삼별초 군사들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군영 앞을 지키던 군사들도 금세 자리를 떠났고, 점점 높게 치솟는 불길만이 눈앞에 거짓말처럼 펼쳐졌다.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것은 분명 몽골군의 움직임이 틀림없었다. 분명 삼별초보다 머릿수로 한참 적었지만, 그들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불길이 더 높아지는 거로 보아, 오히려 삼별초 군사들은 불쏘시개 그 역할에 충실해 보였다.우린 일단 나무에서 나와 군영으로 향하였다. 누구도 막
그들은 성의 북쪽을 노렸다. 아마, 나였어도 그곳을 선택했으리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몽골군 몇과 나를 포함한 얼마 안 되는 인원으로 어떻게 성주청까지 점령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쉬지도 않고 여기까지 달려온 터. 누가 내 뼈를 반으로 부러뜨린다 해도 더 이상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와 함께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숨을 거칠게 휘몰아 쉬기에 여념이 없을 뿐. “뭣하는 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몽골군 대장이 허공에 채찍을 휘둘렀다. 그가 타고 온 말고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리며 헉헉거리
점점 진해지는 피비린내와 함께 눈앞에 삼별초의 깃발이 점점 선명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몽골군을 뒤따라 더 빠르게 발을 재촉하였다. 저들도 분명 보았을 것이다. 흙먼지를 이끌고 거세게 돌진하는 우리의 모습을.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치솟는 말 울음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들으라는 듯, 발굽으로 땅을 거칠게 내리쳤다. 한 발짝씩 내딛는 힘도 만만치 않았다.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입구를 지키는 삼별초 군사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날 때쯤에야,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금세 방어 진열을 갖췄고, 군영 한가운데서
몽골군, 그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삼별초 군사들이 쓰러지는 모습은 순식간이었다.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기는 현장까지도 눈 깜짝할 사이에 정리되었다. 나를 포함해 숨어있는 사람들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그들의 시선이 우리 쪽을 향한 순간, 모두 숨 막힐 기세로 침묵에 충실했다. 나뭇잎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도 소음이 되게끔 주변 공기마저도 스칠 기세로 숨도 꾹 참아냈다. 발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우리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림자가 우리 쪽에 바깥 가까워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누구 하나
마을은 조용했다. 말 그대로, 어느 누구도 큰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는 티가 역력했다. 딱히 마을 안에서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때가 되면 마을 한가운데에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식량을 나누어줬다. 어디서 구해온 식량인지는 아무도 궁금해하려 하지 않았다. 매번 바뀌는 식량에도 역시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양도 주면 주는대로 조용히 받아갔고, 어쩌다 늦게 나온 사람이 못 받아가는 일이 생겨도 역시 별문제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마을 곳곳에 불을 피웠다. 딱히 누가 다니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집집마다 어둠을 끌어안고 침묵에
저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숨어서 돌만 던지던 자들도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전혀 적지 않았다. 단순히 머릿수만 따지고 보자면, 여느 부대와 맞먹을 정도였다. 여기서 분명한 건, 이들은 절대 삼별초가 아니라는 점. 그렇다고 딱히 복장이 통일된 건 아니었다. 대부분 거의 몸에 거적데기를 겨우 걸친 수준이었고, 군데군데 상처로 가득한 속살을 전혀 숨길 기미가 없었다. 내 목소리에 잠시 멈칫하던 저들은 갑자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갑자기 다른 데로 움직일 상황은 아니었다. 뒤로는 배 한 척
분명 같은 바람에 맞서는 상황이건만. 내가 탄 배는 좀처럼 나아가질 않았다. 오히려 뒤로 점점 밀리기까지 했다. 그 사이, 탐라 쪽에서 나타난 배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조금씩 모습이 드러났는데,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 삼별초.어떠한 신호도 없이 무조건 배를 바짝 붙이더니, 거의 닿으려고 하니 그쪽에서 사람들이 뛰어서 넘어왔다. 무작정 우리 배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칼부터 들이미는 게 아니던가? 선장은 재빨리 두 손부터 들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배에 사람들은 모두 두 팔이 묶이고 말았다. 갑판 한가운데에 모아
파도가 높게 차고 올랐다. 곳곳에 식량과 잡다한 것들을 채워놓은 작은 상선은 물결과 함께 정직하게 움직였다. 난간을 꽉 붙든 나와 일행도 마찬가지로 들이대는 파도에 표정이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특히 상인으로 변장한 고려군들은 더 그랬다. 누가 보면, 난생처음 배에 올라탄 듯 좀처럼 몸을 계속 비틀고 있었다. 그중에는 아예 엎드리거나 누워서 숨만 겨우 고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배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조금 전까지 발을 디뎠던 육지가 점점 희미해질수록, 파도는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몸을 들이댔다. 상선은 그저 거친 바람 앞에
바람에 펄럭이는 건, 바로 고려군의 깃발이었다. 그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는 금세 저 멀리 산을 가려버릴 정도였다. 거침없이 행군하던 부대는 우리를 발견하더니 일단 속도부터 늦추기 시작했다. 거기서 기마병 몇몇이 확 튀어나오더니 돌진하듯 다가왔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올 무렵, 그들이 내민 건, 칼끝과 창끌이었다.“네놈들은 누구냐?” 우리를 둘러싼 기마병이 괜히 한 번씩 창과 칼을 아슬아슬하게 갖다 대려고 했다. 여기서 우린 오히려 손에 쥐고 있던 무기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부터 번쩍 들었다. 이것도 시원치 않아서 아예 바닥에 바짝
삼별초, 그들이었다. 그것도 김통정이 직접 군사들과 함께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슬며시 웃음기를 띠며 다가오라 손짓하였다. 그러나 내 주변에 있는 노인들의 눈빛이 발목을 꽉 붙들어 맸다. 함께한 일행도 마찬가지로 삼별초와 노인들을 번갈아 살펴보며 우물쭈물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성문이 열렸으니, 속히 들어가자!”김통정의 손짓에 삼별초 군사들이 한 발자국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보다 먼저 삼별초를 향해 달려가는 자가 있었으니.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노인 중 한 사람이었다. 머리부터 발
문이 닫혔다. 조금 전까지 샅샅이 살펴봤던 바로 궁에서 말이다. 우린 서로 얼굴을 살펴보았다. 분명 궁에서는 누구의 발자국도, 인기척조차 최소한 우리 곁을 조금도 스치진 않았다. 주변 공기가 점점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 막아선 노인들의 그림자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라. 목숨은 살려줄 터이니.”그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궁에 들어가기 전, 봤던 자들 중 한 명은 아니었다. 반쯤 깨진 투구에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구멍난 갑옷, 어깨에는 줄이 축 늘어진 활이 겨우 걸려 있었다. 오른손에는 날이 바짝
성문이 열렸다. 누구도 이곳을 지키진 않았다. 여기까지 함께 온 삼별초 군사들만으로도 충분히 성벽까지도 장악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삼별초의 움직임은 딱 거기까지. 지나온 길은 빙 둘러서 완전히 막아버린 채, 저들이 손수 열어둔 성문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하였다. 달리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와 별동대원들은 성안으로 순식간에 들어오고 말았다. 동시에 성문이 굳게 닫혔고, 자신들의 기별할 때까진 절대 나올 생각은 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점점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잠시 듣다가 내 손에 꽉 쥔 줄부터 놓았다. 그
다름 아닌 김통정이었다. 싸늘히 식어서 비린내까지 풍기는 별동대장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자신의 칼을 뽑아들더니, 이미 푸른 기운이 드러난 그의 왼쪽 가슴을 깊게 푹 찔렀다.“고생하셨소.”내겐 한마디 남기고는 먼저 발을 돌렸다. 그를 따르는 군사와 함께 용장산성에서 빠져나왔다. 군영으로 돌아와서도 김통정을 비롯해 다른 군사들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와 함께 다녀왔던 별동대원들도 마찬가지로 놀란 눈치였지만, 애써 태연하게 각자의 자리로 복귀하였다. 며칠이 지나도록 김통정은 따로 어떠한 명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