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허리를 지키는 칼에 난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고려군과 그에 동조한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있었다. 대부분 투항과 동시에 전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중 고여림과 김수의 수족 같은 몇몇은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어찌할 것이냐?내 손등을 꽉 붙잡은 김통정의 손아귀에 힘이 한껏 실렸다. 옆에서 내려다보는 이문경의 눈에도 힘이
김통정, 그를 올려다보는 이문경의 낯빛은 점점 어둡게 물들었다. 곁을 지키던 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김통정과 그 일행에게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처음 배를 봤을 때 반기던 모습과 다른 기운이었다. 그들에겐 아군이건만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그들을 멀찍이서 살펴보았다. 김통정의 수하들은 행동이 예사롭지는 않았다. 자신의 머리보다 더 큰 칼을
이문경은 포구에 서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 곁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이 합세하였다. 이내 군영 곳곳에 있던 다른 군사들도 하나둘씩 이문경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두 손을 힘껏 올린 채, 점점 가까워지는 배를 향해 서 있었다.돛의 맨 위에 달린 깃발은 검은색 바탕이지만 붉게 물든 새 그림이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였다. 이문경과 군사들의 시선은 모두
어둠 속에서도 빛을 머금은 칼이 내 목으로 다가왔다. 그러니 끄트머리가 부러진 칼과 바람에 흔들리는 김수의 팔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지슬은 왼쪽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기침만 연신 내뱉었다.“용케 살아있었구나. 패악한 것들!”김수의 목소리는 굵직했지만 아주 옅은 바람에 금세 사라졌다. 내 목에 바짝 붙이려던 칼끝마저도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그의 곁을
어둠을 가르고 솟아오른 불화살이 눈앞에서 재빠르게 떨어졌다. 왕자는 억, 하고 신음을 내뱉더니 무릎이 땅바닥에 붙고 말았다. 손에서 칼을 떨어뜨렸고, 오른쪽 어깨는 아직도 불타오르는 화살이 깊게 박혀 있었다. 그걸 시작으로 검게 물든 하늘은 어느새 불화살로 차츰차츰 뒤덮였다. 왕자 곁을 지키던 수하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몇몇이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졌다.“기습
화살과 함께 쏟아지는 비명 속에서도 지슬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나와 여기까지 함께 온 이는 그저 몸을 잘 숨기라는 한마디만 내뱉고 서둘러 고려군 진영으로 달려갔다. 그 역시, 몇 발의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스쳤으나 금세 고려군 진영 속으로 그림자를 감추었다.“쏘아라!”“몬딱 모사불자!”화살은 불과 함께 하늘을 뒤덮었다. 양쪽 진영에서는 그 아래로 달려
고성은 금세 비명으로 뒤덮었다가 적막이 되어 돌아왔다. 잠시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바닥에는 쓰러진 그림자가 둘 있었고, 눈앞은 방금 나와 마주 보았던 그가 서 있었다.“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는 게요?”쓰러뜨린 군사들의 머리채를 잡고 담장 안으로 끌어내는 그가 내뱉은 말에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설마, 몰라서 내게 묻는 걸까? 당장 어떤
바람이 울었다. 피비린내가 짙어질수록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의 울음은 땅바닥에 곤두박질하였다. 내 목에 스민 칼도 바람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 쓰러지는 사람들은 늘었지만 정작 난 똑바로 서 있을 뿐이었다. 삼별초 군사들은 군영에서 뿔뿔이 흩어졌고 그 자리는 낯선 그림자들이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횃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다름 아닌 고여림과 그의
성문이 열렸다. 군영에서 성 밖으로 나갈 때까지,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이들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양팔을 높이 들면서 환호하였다. 특히 가장 앞장선 지슬에게 향한 눈빛과 함성은 여느 때보다 뜨거웠다. 그들 중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지슬의 어머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백주에, 병력 대부분을 움직이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환호
결국, 아이는 지슬의 품에서 숨을 멈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를 포함해 이문경과 삼별초조차도 몰랐다. 그 아이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시작에 불과했음을.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군영 앞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물론 식량을 얻으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지슬의 품에서 죽은 아이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모습을 하필 탐라 사람들이 보았고 그
이문경, 그의 눈빛에는 핏기가 감돌았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거두지 않은 채 지슬을 내려다보았다. 이를 꽉 깨문 지슬은 바닥에 닿은 무릎을 비틀었다. 이문경은 그의 정수리에 힘껏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내 입술에 물기가 메말랐다. 그러나 단순히 두 사람의 기운 때문은 아니었다. 처소라고 들어온 이곳은, 다름 아닌 영암부사가 사용했던 막사였다.
불길은 높게 솟아올라 이문경과 삼별초 군사들의 뒷모습을 완전히 가렸다. 그 주변에 있던 탐라사람들은 모두 괴성과 함께 사방으로 달아나기 분주했다. 나 역시도 소리만 안 질렀을 뿐,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붉게 타오르던 불은 점차 시커먼 연기를 몰고 오더니 금세 눈앞까지 들이닥쳤다.“가게 마씸!”옥사에 함께 있었던 그가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눈동자가 시뻘겋
삼별초, 어둠이 햇빛에 물러나면서 드러난 그들의 옷차림새로 확신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고려군과 비슷하지만 오른쪽 가슴팍에 새겨진 괴이한 형상의 문양은 오로지 삼별초만 쓰는 것이다. 호흡이 급격히 가빠왔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몰려든 인파 사이로 약간 물러난 상태에서 이문경을 다시 살펴보았다. 머리부터 팔다리가 깡마르고 날이 선 턱과 눈썹은 위로 바짝 올라간
북의 울림이 온몸을 휘감았다. 바닷물은 탐라를 눈앞에 두고 길을 쉬이 열어주지 않았다. 낯설지 않은 거센 물결이었지만, 뱃속에 창자는 이미 뒤엉킨 듯 도무지 허리를 제대로 펼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건 배가 쉬이 길을 열지 못 할 뿐 기대치보다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군사들은 하늘로 바짝 내지르던 환호를 거두자마자 각자 자리에 돌아갔다. 닻과
바닷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따끔거리는 눈을 떠 보려고 했으나 칼로 찢어지는 고통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양쪽 귓속으로는 물살이 부딪치는 소리보다는 낯선 자들의 웅성거림이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동시에 어깨부터 시작하여 팔다리까지 스며드는 통증에 온몸을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끝을 힘껏 오므리면서 소리를 한 번 크게 내질렀으나 누구도 이에 반응하지
도대체 어찌 저것이 눈 앞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영암부사가 아닌 고여림의 손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서린 이슬은 먹구름을 머금었다. 그가 내민 손을 잡았으나 선뜻 일어날 수가 없었다.“어서 일어나시게!”그는 목소리 끝에 힘을 주었다. 덩달아 나도 몸을 일으켰다. 창살 너머로 마주 본 그의 얼굴은 실핏줄이 군데군데 서려 있었다. 거칠게 숨을 내쉴 때마
고여림은 그날부터 입가에 미소의 자취를 완전히 거뒀다. 수문장의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하루이틀은 평소처럼 활동하더니 갑자기 처소에 들어가더니 그림자조차 내밀지 않았다. 그의 부하들조차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모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상태로 각자 할 일만 조용히 맡았다. 영암부사도 몇 번 이건 그의 처소 앞을 서성거리며 화를 내고 달래기도 했으나 번번이
영암부사 앞으로 다가온 지슬,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곳에서 탐라 사람들은 원성을 크게 드러냈다. 특히 노인들은 그의 이름을 거듭 강조해서 불렀고,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내기까지 했다.“느가 어떵 겅헐 수 이시냐!”쏟아지는 삿대질에, 지슬은 주먹을 꽉 쥐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영암부사의 군사들
통행제한 사흘째, 성주청 앞에는 아직 핏기가 마르지 않은 사람들의 머리가 하나둘 쌓이고 있었다. 탐라 사람들은 거리를 오가며 군사들과 눈만 마주쳐도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마저도 비쩍 마른 다리로 바닥의 흙먼지를 일으키는 것이 이목을 더 끌었다. 사람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떠도는 말에는 괜히 무리하게 몸을 피했다가 붙들린 자들도 적잖다는 것. 그동안 고려
주변 공기가 점점 싸늘하게 굳어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뒤덮였던 고성과 울음소리는 영암부사의 기침에 맥없이 바스러져 바닥에 흩날렸다. 그를 올려다보는 탐라 사람들의 눈빛은 날이 바짝 섰지만 결코 예리하진 않았다.“하옥하라!”그의 손짓에 군사들은 발길질을 아끼지 않았다. 쓰러진 탐라 사람들은 하나둘씩 차례차례 줄을 세워 옥사로 이동했다. 지슬은 고여림 장군의